올해 고난 주간은 더욱 십자가의 의미가 크게 마음에 와 닿는 시간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고난을 넘어서 지금 우크라이나의 전쟁의 고난을 지켜보면서 점점 세상의 죄악의 심각한 한계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초과학 문명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여전히 과거 이상으로 인간의 죄악의 실상은 더해진 모습입니다. 전혀 죄의식 없이 미사일 버튼을 누르고 총을 쏘면서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전쟁의 실상을 보면서 차오르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곤 해서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습니다.

과연 고난의 전쟁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이미 예수님은 고난의 시대에 오셔서 고난을 담당하시고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담당하셨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 죄를 담당하신 범위 안에는 과거 나찌에 속한 사람이나 지금 양심에 화인맞은 채로 전쟁하는 러시아 군인이나 푸틴 같은 사람에게도 적용이 될까 질문하게 됩니다. 이미 성경 속에서 역사 속에서 가장 반복되는 질문은 악인들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의 용서의 적용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적용의 대상이 원수까지도 제한없이 차별없이 적용하기를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용량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서 더 낫다 더 옳다라고 생각하는 자기의와 자기만족들이 우리에게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적용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은 죄인이요 원수같은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서 남과 나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와 자랑을 공로로 스스로를 옳다 여기며 자랑하는 나의 의는 부질없는 행위입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임으로 자기 공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전쟁을 보면서 일어나는 모든 자기 감정과 생각조차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자비와 긍휼을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화인맞은 양심으로 악을 행하는 악한 삶을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의 대속의 십자가를 담당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된 우리에게는 대속의 고난의 십자가를 담당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대속의 고난을 담당하는 것은 주님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수같은 사람들을 품고 미움을 버리고 용서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미움과 정죄의 마음을 버리고 더욱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용서하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Category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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