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벽마다 매일성경 민수기의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돌아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 속에서도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반복되는 원망과 거역과 불순종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보이시고 나타났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못했던 사람처럼 행동했고 과거로 돌아가는 루틴을 반복했습니다. 결국 광야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소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그 소수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의 터를 이루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우리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주일은 우리 교회가 어느덧 49년의 역사가 되었고 플러싱에서 사요셋으로 이사한 시간도 벌써 7년을 맞이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이 중요한 것을 보게 되고 사람에 대한 검증이 됩니다. 누가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사람인지 역사를 통해서 걸러지게 됩니다. 숨겨있던 인간의 죄성은 결국 시간이 흘러가면서 다 나타나게 되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듯 지금 교회 역사 가운데 보게 됩니다. 부정과 긍정은 글자 한자가 차이이지만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행동과 말의 열매를 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성경의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비록 소수이지만 믿음으로 역사를 이어가는 증인들이 우리 교회 가운데 세워지고 있는 것을 돌아보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의 역사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그들은 외부의 환경, 외부의 적들을 바라보면서 싸우려고 했지만 진작 자기 안에 숨어있는 죄의 적들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그 결과 항상 원망하고 불순종하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객관화하지 못했습니다. 반복되는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게 보면서도 현실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 것은 결국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지금도 광야같은 세상에서 함께 신앙의 역사를 만들어가면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소홀히 여기면서 외부의 적들과 열심히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소수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는 사람들은 묵상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기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열심히 이스라엘을 인도하여서 가나안의 승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열심을 묵상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하는 은혜의 열심을 갖고 우리 교회를 끌어가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은혜는 놀라운 섭리와 기적 가운데 예비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지금까지 교회 역사를 세워가신 분은 오직 하나님의 열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립니다

인생 후반전을 맞은 나의 주변에는 인생 후반전을 맞이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보통 100세 시대에서 50세가 넘어가면 인생 후반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미국에서는 나라의 연금을 받고 노인아파트를 받는 시기인 62세 또는 65세의 나이가 되면 실제적인 인생후반전의 시기가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70세의 나이가 되면 모든 직분과 사역에서 은퇴하면서 인생후반전의 시기를 절감하게 됩니다.

인생 후반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마음은 내가 주인되어서 통제하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중심되어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주도적인 인생을 살수 있었습니다. 이제 인생 60이 넘어가면서 인정해야 할 현실은 이제는 나를 내려놓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마음을 하나님이 다스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인생 후반전에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더욱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 하나님과 일대일의 교제의 시간을 매일 깊이 있게 갖아야 합니다. 시간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즐겁고 기쁜 일대일의 마음의 시간을 갖으면서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인생 후반전은 풍성한 마음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인생 후반전에 포기하지 않는 학습의 삶을 도전해야 합니다. 인생의 후반전에 배움을 멀리하거나 멈추어버린 사람은 급속하게 노인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더욱 인생 후반전에 시간을 아껴서 지금까지 관심은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더욱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많은 인생 후반전에 있는 사람들이 나라에서 세운 평생학습원에서 제빵기술, 목공기술과 같은 실제적인 삶의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언어와 악기와 같은 것들을 열심히 배워서 제2의 인생을 위한 도전을 합니다. 한국같은 환경은 아니지만 미국도 얼마든지 인생후반기에 다양한 배움들을 도전할 수 있습니다. 매일 집에만 갇혀 지내지 말고 교회나 도서관 그리고 공원이나 데이케어와 같은 시설을 이용해서 열심히 배움의 시간을 갖는 인생후반기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인생 후반전에 더욱 경청의 삶이 필요합니다. 인생 후반전에 정말 필요한 삶은 입술은 닫고 귀는 열어야 합니다. 평생 살아왔던 인생의 많은 경험들을 인생 전반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 말을 해서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점점 세상은 변화되어서 과거의 방법이 현재의 삶에 상황적으로 매칭이 안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아직도 과거의 것들이 유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인생 후반전을 사는 삶의 지혜는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말보다는 행동과 삶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는 꾸준한 삶의 능력이 있을 때에 인생 전반전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이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삶의 본을 보이는 능력입니다. 만일 이것들이 준비가 안된 인생 후반전의 사람들은 더욱 자신의 몸을 쳐서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을 통하여 가정을 더욱 묵상하는 기회가 됩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우리 가정은 믿음으로 잘 세워져가고 있는가 스스로 끊임없이 돌아보고 점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경 가운데 믿음의 가정들도 죄악의 문제가 반복되면서 가계도 가운데 악영향을 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가인의 죄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의 죄는 이삭의 거짓말의 죄로 유전되고 야곱의 거짓말로 발전되었습니다. 다윗의 정욕의 악한 죄는 솔로몬의 악한 정욕으로 자라서 결국은 르호보암의 충만한 정욕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위해서 부모 세대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의 삶의 본을 심어야 합니다. 매일 같이 일어나서 먼저 몸과 시간을 하나님에게 내어드리는 말씀과 기도의 삶의 본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가계도를 위해서 먼저 부모들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가계도를 위해서 먼저 부모들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의 가계도를 위해서 먼저 부모들이 순종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한사람의 희생의 본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말이 아닌 몸으로 먼저 자신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심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가계도 가운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위해서 부모 세대에서 먼저 믿음의 삶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말하는 삶의 본을 우리는 보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기초는 말의 사용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악한 말, 불신의 말, 부정적인 말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자녀들 앞에서 무심코 하는 더러운 말이 그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잘못 심겨지게 되면 믿음의 가계도를 이루는 일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무엇보다도 항상 신실한 삶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성실하고 정직한 삶으로 맡겨진 일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나눔의 삶을 살때에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위해서 다음 세대에게 우리는 투자해야 합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이어가려면 다음 세대들에게 말씀을 알고 배우고 묵상하도록 투자해야 합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이어가려면 교회를 출석하도록 가르치고 이끌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위해서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수련회의 시간을 갖도록 그리고 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투자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만시간의 법칙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1만 시간을 투자할 때에 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반복되어가는 가운데 마음과 몸에 입력된 것들이 있을 때에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반복하여 가르치고 배우고 알도록 할 때에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관계가 깨어진 교회를 중재하는 섬김의 시간을 갖았습니다. 아름다운 역사가 있었던 교회였지만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다 흩어졌고 소수의 나이드신 성도님들만 남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안에서 또 목회자와 관계가 깨어져서 하나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정황이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확인한 것은 관계가 깨어진 것은 이미 오래전 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서로 문제를 위장하고 회피하면서 많은 시간이 흘러보냈습니다. 그 결과 서로의 관계는 더 냉냉하고 서로에 대해서 적대감이 마음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진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문제를 직면하기 보다 회피합니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얼굴을 피하고 만남을 피하고 대면을 피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안전한 동굴로 들어가서 자기를 방어하려는 이기적인 본능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서 마음이 깨어진 사람들은 남들과 만나는 것들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격리하여 안전지대를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회피하는 것은 마치 병을 방치하는 것처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길입니다. 내가 방문했던 교회도 문제를 회피하다가 더욱 악화시킨 결과였습니다. 물론 관계가 악화될 때에 서로 격리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계속 회피하기 보다는 솔직하게 직면하여서 문제를 풀어가는 시작이 필요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직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혹시 나에게도 부분적으로 관계를 깬 책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교통사고가 나면 대부분 결론은 얼마이든지 쌍방 과실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완전하게 상대방 차의 잘못인 경우에는 분명한 팩트가 있는 경우입니다. 보통 인간관계의 문제는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에서 부엌에서 들으면 며느리 말이 옳지만 안방에서 들으면 시어머니 말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계를 회복하려면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대부분 약자의 입장에 서거나 피해자의 입장을 전제하면 객관적인 직면은 어렵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서 미루지 말고 직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마음에 누구에 대해서 미워하고 맺혀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본인 뿐 아니라 그 가정과 삶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들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기가 어렵다면 중재자를 내세워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오는 것을 소멸하지 말고 용기는 내어 풀고 사과하고 서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용기있게 직면하는 관계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내와 결혼한지가 올해 5월이 되면 33년이 되었습니다. 결혼 때부터 지금까지 철칙처럼 지키는 것 하나가 경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부모님이 서로 경어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에게 존칭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화가 나고 싸우실 때에는 그 불문율이 깨질 때도 있었지만 일상의 삶에서는 항상 말의 예의를 대부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시절 그런 부모님의 모습이 좀 어색하고 이상하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내 삶의 법으로 결국은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일 지라도 항상 경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거룩한 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식같은 연령의 사람이지만 그 사람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에 경어를 사용합니다. 때로는 한창 후배 목사들과 교제를 할 때에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예의를 차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이미 한 교회의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에 대한 예의를 지켜가는 이유는 인간 관계는 말로 인해서 대부분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가깝고 친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말을 하다가 관계가 힘들어지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교제할 때에 교회 용어로서 호칭을 사용하는 매너가 필요합니다. 특히 직분이 있는 사람을 부를 때에는 직분으로 호칭하는 예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모임과는 다른 주님의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과 같은 용어는 단지 직분으로서 사역을 하는 것 뿐 아니라 서로가 호칭을 통해서 사명자인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상대방에게 예의를 차려서 말 해야 합니다. 만일에 교회가 세상처럼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세상적인 용어를 쓰면서 교제를 한다면 결국 교회의 거룩한 정체성을 망가뜨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말을 할 때에 먼저 남의 말을 잘 듣는 매너가 필요합니다. 목장에서 서로 대화하면서 교제할 때에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는 매너가 필요합니다. 특히 남들이 이야기할 때에 나와 의견이 다를 경우에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매너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정치 소신을 말하면서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버려야 할 매너입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만이 마치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함부로 비판하고 부정적인 말을 확신있게 말하는 비배너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말의 매너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남을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이해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계절을 통하여 다양하게 우리에게 만나주십니다. 계절마다 다양하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봄의 나무 그리고 꽃을 통해서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더 푸르른 하늘을 통해서 더 넉넉한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봄 계절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봄에 만나는 하나님은 생명의 신비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봄을 통해서 생명의 신비를 하늘에도 보게 하고 땅에서도 느끼게 하고 모든 공간 중에서도 알게 하십니다. 봄이 되면 죽었던 것같은 모든 곳에서 봄과 함께 놀라운 생명의 역사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모든 곳에 봄이 오면 어김없이 놀라운 생명의 역사들을 통해서 만물을 통해서 꿈을 갖게 되고 기쁨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자연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 가운데 봄이 오게 하십니다. 인생의 봄은 인간의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찾아오셔서 생명으로 일하시는 사람은 새로운 인생의 꿈을 갖는 봄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봄에 만나는 하나님은 때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봄에 피는 모든 꽃들은 지극히 제한적인 시간을 머무르다 갑니다. 그 화려한 벚꽃의 시간들은 보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끝이 납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의 제한된 시간들은 하나님이 허락한 시간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봄꽃들의 시간을 너무도 짧은 시간으로 제한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시간들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하시되 우리에게는 꽃같은 인생을 통해서 제한되니 인생의 시간들을 돌아볼 것을 권고하십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꽃과 같은 인생임을 바라보시면서 잠깐의 유한한 인생 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기대하십니다.

봄에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만물을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연히 피고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백합화를 창조하고 들에서 피도록 섭리하기 때문입니다. 백합화는 우연히 들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하심으로 들에서 피고 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놀라운 섭리를 갖고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너무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들에 피는 백합화를 주관하시듯이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새벽마다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함께 갖았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새벽마다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체험하는 은혜를 갖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몸으로 직접 고난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체험을 통해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더욱 아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몸을 깨워 기도하면서 고난의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깨우며 주님을 주님으로 회복하는 기회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의 시간들은 반드시 삶으로 인격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체험들은 삶과 인격으로 연결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과의 체험이 바른 체험이라면 바른 인격과 바른 삶의 체험으로 반드시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바른 신앙 체험은 자기를 내려놓는 체험입니다. 성경의 사도바울은 날마다 자기 몸을 쳐서 주님의 주인되심의 체험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죽고 주님으로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이요 바른 신앙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주인되는 삶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인이 되기 위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고 주님에게 복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나의 헛된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나의 육신의 엣습관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복종이 필요합니다. 나의 복종없이는 주님의 주인되심도 없습니다. 나를 쳐서 복종하여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인격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더욱 주님 중심의 삶의 체험으로 승리합니다.

바른 신앙 체험은 주님이 주인되는 체험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교회에서 주인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공 예배를 드릴 때에 먼저 주님이 주인되시는 바른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주님이 주인되기 위해서는 그 외의 것들은 좀 내려놓음이 필요합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결국 주님에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 중심으로 교회 생활을 할 때에 사람들의 거슬리는 부분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혹시 예배 속에서 교제 속에서 주님이 주인되는 교회 생활은 사람을 넘어서 결국 주님 중심의 바른 공동체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사람 중심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 체험을 하면 할수록 상처의 연속일 될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 가운데 운행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체험하시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더욱 온전한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바른 신앙 체험은 삶의 우선순위가 주님되는 체험입니다. 매일 주님과의 만남을 우선순위로 여기는 바른 만남의 사람이 결국 삶 가운데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승리합니다. 구체적으로 날마다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반복하여 주님과 대화하고 깊은 묵상의 나눔과 만나는 사람은 일상에서 바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일이 우선순위가 되는 사람은 일의 승리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주님의 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심으로 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일과 생활은 결국 의미없는 일상이 될 뿐입니다. 얼마든지 세상 사람들도 이런 삶은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일 모든 삶 가운데서 바른 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주인되는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선 순위 가운데 주님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믿음이 기초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가장 큰 수치요 고난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의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사람을 매어달고 서서히 힘든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극한 고통을 최대한 온 몸으로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서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극한 고난을 겪으시고 결국 운명하셨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사형수의 죽음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눅22:43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시면서 순종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기 위하여 온 무리를 향하여 베드로가 검으로 대적하였을 때에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 하시고 순순히 순종의 몸이 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그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친히 못 박히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난의 시간을 체험하시고 마침내 고난 가운데 죽음의 순종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죽음은 자기 백성들의 대속을 위한 순종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자기 백성들을 되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구원을 위한 목적을 완성하시고 마침내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반드시 치루어야 할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구원을 위한 고난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를 약속하셨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세상적으로 보면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마침내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가장 묵상해야 할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 앞에서 순종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선물은 오직 십자가의 고난의 댓가입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받은 구원의 은혜를 더욱 묵상하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소원합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운동과 신앙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운동을 구경하는 사람과 직접 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은 너무도 다릅니다. 이론적으로 축구에 관하여서 기가 막히게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몸으로 축구를 해보면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내가 안다도 생각하고 말을 하지만 직접 몸으로 해보면 잘 되지 않습니다. 실력있는 선수는 내가 아는 대로 그대로 몸으로 적용이 되는 선수입니다. 운동선수가 내가 아는 대로 몸으로 그대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반복하여 연습할 때에 가능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고수는 결국 아는 대로 적용하는 삶이 있는 사람입니다.

적용의 은혜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기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은 오직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내가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적용이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말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삶 가운데 부족한 삶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적용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자기 부족함을 알고 돌아보는 사람들입니다. 적용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보면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항상 조용하고 꾸준하게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면서 일상의 삶을 승리합니다.

적용의 은혜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복을 경험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이땅에 임하여서 다양한 은혜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은 대부분 눈에 보이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고 체험할 수 있는 누림의 복들이 많습니다. 특히 마음 가운데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은 놀랍고 기이합니다. 또한 일상 가운데 하나님이 베푸시는 인도의 은혜는 기이합니다. 많은 경우에 적용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경험하도록 인도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적용의 은혜의 결과로 누리는 핵심적인 복은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여 주님을 닮은 제자로서 우리가 새롭게 변화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사실 성경가운데 일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적용하면서 살았던 하나님의 위대한 증인들처럼 하나님 앞에 쓰임받습니다. 적용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변화로 인해서 주변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용이 있는 구체적인 믿음의 능력있는 삶입니다. 내가 믿은 대로 내가 바르게 적용하면서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신앙의 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서를 적용해야 합니다. 용서 없는 신앙은 주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용서 없는 삶은 주님의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은 용서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용서를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용서를 적용하기는 힘들어도 그 적용의 결과는 형용할 수 없는 풍성함을 얻습니다. 분명한 것은 용서의 십자가가 그 마음에 있는 사람은 용서를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마지막에 보여주신 것은 용서였습니다.

     용서의 적용을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받은 그 크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나를 무조건적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나는 20대 때에 불의하고 부정한 사회를 보면서 많은 분노와 원망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20대 때에 내가 본 교회 어른들의 부정과 잘못됨을 보면서 상처가 컸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보는 이웃들의 죄보다 더 크고 무서운 죄를 내 안에 갖고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를 모든 죄를 정죄하지 않고 내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였을 때에 용서의 자유함을 주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고 용서받은 것을 알게 되면서 상처의 이웃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의 적용을 위해서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정말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용서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용서할 수 있도록 마음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용서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성령님이 계시고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용서의 적용은 필연적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소멸하고 내 감정과 내 생각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성령님의 인도를 소멸하고 용서의 적용을 거부한다면 가장 손해는 우리 자신일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 없는 우리 마음은 지옥같이 갑갑하고 답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가운데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용서의 마음을 소멸하지 말고 용서를 적용해야 합니다.

     용서의 적용을 위해서 내가 먼저 적용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왜 내가 먼저 적용해야 합니까? 결국 용서하지 않을 때에 가장 피해자는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서하기를 주님은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적용할 때에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지금 당장 적용해야 할 긴급한 주제입니다. 만일 지금 적용하지 않을 때에 사탄 마귀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노리고 공격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가운데 미움과 원망과 비판과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납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결국 마귀의 도구가 되어 모든 관계를 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를 시작할 때에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봄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도 용서와 더불어 따뜻한 새봄을 맞이하는 회복과 소생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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