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는 30대 후반의 한 그리스도인과 인생 문제에 대한 깊은 상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심성이 고운 미혼의 그리스도인 자매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헌신이 깊고 믿음대로 살기를 소원함이 있는 자매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를 갖고 무엇이 바른 길인가 점검을 원하는 질문을 갖고 함께 교제하며 인생 점검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인생을 살면서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배와 같이 흘러가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자매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 인생의 몇가지 문제를 점검해야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 인생은 비전을 점검해야 합니다. 비전이 없는 인생은 방향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자동차는 열심히 속도를 내는 것보다 분명한 목표의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면 속도를 내면서 길을 가다가 수시로 목표지점이 바뀌는 삶은 내면의 불안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먼저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의 비전을 주시고 도전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방인을 품게 하시고 선교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 비전을 갖고 살도록 하십니다. 아직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마음에 먼저 품을 때에 우리 인생의 방향은 흔들리지 않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 인생은 발란스를 점검해야 합니다.인생은 발란스를 잘 갖추어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 다. 무엇보다도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모임과의 관계의 발란스를 잘 해야 합니다. 만일 발란스가 한쪽에 치우치는 순간 결국 삶의 질서가 무너져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 가정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 그리고 직장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가정에만 집중하고 교회와 직장을 소홀히 하는 순간 영적인 은혜, 물질의 은혜가 제한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만 집중하게 되는 경우에 가정과 직장의 은혜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발란스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부지런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 인생은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인생은 만남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좋은 만남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좋지 않은 만남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내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만남은 냉정하게 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인생에서 당장 끓어버려야 할 만남은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부정적인 동기의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속이는 말과 행동으로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깨끗이 끊어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지만 잘못된 믿음으로 나를 조종하려고 하려고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깊게 고민하고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만일에 거짓되고 부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면 결국 마이너스 인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열심히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좀 시간을 갖고 자신을 돌아보며 점검하면서 바른 비전 그리고 발란스 있는 인생과 더불어 좋은 관계의 삶으로 의미있고 풍성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올 상반기 제자훈련을 모두 마쳤습니다. 올 상반기에는 성장반 그리고 제자반 두 반을 12주동안 훈련했습니다. 올해로서 제자훈련을 한지 26년째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이민교회의 제자훈련의 시간도 13년째가 되었습니다. 제자훈련의 기대감을 갖고 처음 시작했을 때가 어제같은데 너무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목회 현장에서 제자훈련을 한 결과의 성과를 보면 눈에 보이는 큰 성과를 말하기는 초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하면서 열매와 관계없이 조금도 후회가 없는 이유는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목회를 시작하는 후배 목사들에게 제자훈련 목회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습니다.
이민 교회의 제자훈련은 한국에 있는 교회보다 더 어렵고 힘든 점들이 더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한국교회와 이민교회 모두를 제자훈련을 한 목회자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하나님은 나에게 한국과 미국 다른 상황의 교회들을 경험하면서 제자훈련을 하는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민교회의 상황은 더 다양한 성격의 사람이 많고 더 유동적인 사람들의 환경이고 더 약한 교회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이민 교회에서의 제자훈련이 더 힘든 점들이 있습니다. 특히 작은 이민 교회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다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제자훈련이 더 부담이 되는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주님의 기준을 알고 배우고 기도했다면 그 기준을 스스로에게 먼저 엄격하게 적용해야 하는 거룩한 부담감이 이민 교회는 더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담과 어려움이 있지만 이민교회가 살 길은 솔직하게 문제를 직면하면서 제자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민 교회의 제자훈련은 상황과 타협하면서 형식적인 프로그램이 될 위험이 많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다보면 결국 기준을 점점 낮추어야 하는 것이 이민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민 교회는 굉장한 발란스의 지혜가 요구됩니다. 이것은 단지 제자훈련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삶의 현장의 많은 이민자들은 당장 생계가 힘들고 렌트비가 걱정되는 현실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렇게 삶이 우선순위가 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주님보다 삶이 우선순위가 되어 버티는 것이 당연하게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로 여겨야 합니다.
이민 교회의 제자훈련은 궁극적으로 좋은 평신도 롤 모델의 도전이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에 제자훈련을 말하면 목사들과 같은 특별한 상황의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도전이 되는 것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잘 훈련된 평신도 모델들이 교회 안에서 리더들도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선 지성적으로 영성적으로 영적 리더쉽이 잘 훈련된 평신도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같은 변화된 평신도 모델링이 필요합니다. 이민 교회 가운데 우리 교회가 좋은 제자훈련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매일 일상을 살면서 항상 고민되는 것은 적용입니다. 적용이 없는 묵상은 죽은 묵상입니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죽은 설교입니다. 적용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라고 할 수 있고 제자훈련을 열심히 했지만 적용이 없는 사람은 죽은 훈련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적용을 통해서 비로서 우리의 영성은 완성되는 법입니다. 머리로 많이 알고 있지만 삶 가운데 적용이 안되는 사람보다 비록 머리에 적게 알지만 적용이 잘되는 사람이 오히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일 것입니다. 적용이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계속 성장하고 결국은 주님이 쓰시는 귀한 사람이 됩니다.
적용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나를 부인하는 은혜의 사람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사람은 묵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어떤 사건을 겪어도 모든 것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깨달음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모든 삶 가운데 자기 내면과 삶을 잘 바라보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매사의 삶 가운데 자기 부족을 알기에 모든 것을 통해서 부족한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여기면서 적용하려고 합니다. 항상 믿음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적용을 잘 하는 분들은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부족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용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은혜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을 하고 심지어 찬양하고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경험하는 일은 깊은 교제가 필요합니다.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그결과 은혜로운 삶의 적용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과도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좀 오랜 시간의 헌신과 마음을 여는 교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깊은 영적교제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바른 적용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적용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날마다 자신의 변화를 꿈꾸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적용이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긍정적이고 비전이 있고 인생을 항상 도전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이런 사람들은 가정과 교회를 넘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날마다 새로운 적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갑니다. 그 결과 가정과 교회와 세상 가운데 영향력을 미치고 쓰임받는 것을 봅니다. 결국 하나님은 적용이 있는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매일 같이 적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비전의 삶이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 제자훈련 성장반에서 읽는 책 가운데 미국 드류 대학교의 교수인 레너드 스윗의 ‘관계의 영성’ 이 있습니다. 그는 믿음은 관계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모든 중요한 결정은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하면서 책의 1장에서 세계제2차대전의 원자폭탄 이야기를 합니다. 왜 미국이 원자폭탄을 교토가 아닌 히로시마에 떨어뜨리게 되었는가? 그의 주장은 개인적인 관계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전쟁 장관 헨리 스팀슨이 교토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거기에서 일본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토는 원자폭탄의 첫 번째로 지목된 도시였지만 스팀슨이 트루만 대통령에게 건의한 덕분에 비운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의 중요한 결정들이 관계를 기초로 합니다. 어떤 논리보다 어떤 사실보다 관계의 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관계에 기초한 인생은 그 어떤 인생보다도 힘이 있습니다. 분명히 교회도 좋은 관계가 기초한 경우에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의 관계는 단순한 인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관계가 될 때에 건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 보여주시되면 먼저 종의 위치가 되어서 상대방을 먼저 높여주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서로의 관계를 맺을 때에 상대방의 죄와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고 먼저 용서하시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망스러운 가운데서도 끝까지 서로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관계 가운데 불완전한 갈등을 수용하고 실망을 수용하셨습니다. 우리가 관계에 실패하는 이유는 너무 옳고 그름을 앞세운 나의 기준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서로의 관계는 나의 기준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먼저 예수님처럼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존중하셨듯이 우리는 서로를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이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한 사람은 세상에서 유일무일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그 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무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한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가장 귀한 존재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은 나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취향도 다를 수 있고 나와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차이가 나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판단을 보류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교제하며 관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관계의 기초입니다. 서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관계의 영성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미국 학교의 졸업시즌을 맞이했습니다. 올해 교회적으로는 졸업생들이 많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생 그리고 대학교 및 대학원 졸업생등 다양한 졸업생들이 있습니다. 모든 학교의 졸업은 결코 당연하지 않습니다. 졸업을 맞은 모든 이들은 남모르는 고통의 노력의 댓가를 지불한 결과입니다. 물론 어린 자녀들은 졸업과 더불어 다음 과정의 학교로 또 진학해야 함으로 졸업을 기뻐하기보다 더 무거운 부담감을 갖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교회 졸업생들 중에는 늦까지 어려운 공부의 과정들을 졸업하는 정말 축하받아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많은 고난 속에서 인내하면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 것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목회자로서 다양한 성도들을 만나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인정해주고 싶은 사람은 힘든 환경 가운데 굴복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늦깍이 도전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한계를 극복하고 무언가를 도전하는 것이기에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졸업하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에서 도전하여 성취감을 맛본 사람은 무엇을 해도 앞으로 도전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을 향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도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면서 승리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목표를 갖고 시작은 잘 하지만 마무리를 잘 하는 사람은 그 숫자가 적습니다. 졸업의 마무리를 잘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학교의 졸업장이 우리의 삶을 절대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삶의 성실성을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삶을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익숙한 미국인들보다 몇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미국이란 나라는 좀 부족해도 꾸준하고 성실한 자들에게 기회가 있는 나라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마무리를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성실하고 꾸준한 사람을 하나님을 사용합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같은 공부라 할지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잘 마무리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마무리를 잘 할 수 있는 보증이 되는 사람입니다.
졸업과 더불어 내가 배우고 경험한 모든 능력은 나를 위한 기회이기도 하지만 남을 위한 봉사의 기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알고 더 경험하고 더 소유한 지식과 모든 능력들은 결국은 더 섬기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졸업과 더불어 일터와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 더 아는 만큼 더 섬김의 좋은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배워서 남을 주는 자입니다. 내가 알고 배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중요한 섬김의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졸업을 통해서 나의 수고에 대한 보상받는 차원을 넘어서 이웃을 위하여 더 섬김의 자리로 나가는 귀한 사명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새벽마다 매일성경 민수기의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돌아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 속에서도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반복되는 원망과 거역과 불순종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보이시고 나타났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못했던 사람처럼 행동했고 과거로 돌아가는 루틴을 반복했습니다. 결국 광야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소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그 소수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의 터를 이루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우리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주일은 우리 교회가 어느덧 49년의 역사가 되었고 플러싱에서 사요셋으로 이사한 시간도 벌써 7년을 맞이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이 중요한 것을 보게 되고 사람에 대한 검증이 됩니다. 누가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사람인지 역사를 통해서 걸러지게 됩니다. 숨겨있던 인간의 죄성은 결국 시간이 흘러가면서 다 나타나게 되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듯 지금 교회 역사 가운데 보게 됩니다. 부정과 긍정은 글자 한자가 차이이지만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행동과 말의 열매를 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성경의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비록 소수이지만 믿음으로 역사를 이어가는 증인들이 우리 교회 가운데 세워지고 있는 것을 돌아보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의 역사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그들은 외부의 환경, 외부의 적들을 바라보면서 싸우려고 했지만 진작 자기 안에 숨어있는 죄의 적들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그 결과 항상 원망하고 불순종하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객관화하지 못했습니다. 반복되는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게 보면서도 현실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 것은 결국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지금도 광야같은 세상에서 함께 신앙의 역사를 만들어가면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소홀히 여기면서 외부의 적들과 열심히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소수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는 사람들은 묵상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기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열심히 이스라엘을 인도하여서 가나안의 승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열심을 묵상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하는 은혜의 열심을 갖고 우리 교회를 끌어가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은혜는 놀라운 섭리와 기적 가운데 예비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지금까지 교회 역사를 세워가신 분은 오직 하나님의 열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립니다
인생 후반전을 맞은 나의 주변에는 인생 후반전을 맞이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보통 100세 시대에서 50세가 넘어가면 인생 후반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미국에서는 나라의 연금을 받고 노인아파트를 받는 시기인 62세 또는 65세의 나이가 되면 실제적인 인생후반전의 시기가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70세의 나이가 되면 모든 직분과 사역에서 은퇴하면서 인생후반전의 시기를 절감하게 됩니다.
인생 후반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마음은 내가 주인되어서 통제하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중심되어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주도적인 인생을 살수 있었습니다. 이제 인생 60이 넘어가면서 인정해야 할 현실은 이제는 나를 내려놓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마음을 하나님이 다스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인생 후반전에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더욱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 하나님과 일대일의 교제의 시간을 매일 깊이 있게 갖아야 합니다. 시간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즐겁고 기쁜 일대일의 마음의 시간을 갖으면서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인생 후반전은 풍성한 마음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인생 후반전에 포기하지 않는 학습의 삶을 도전해야 합니다. 인생의 후반전에 배움을 멀리하거나 멈추어버린 사람은 급속하게 노인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더욱 인생 후반전에 시간을 아껴서 지금까지 관심은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더욱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많은 인생 후반전에 있는 사람들이 나라에서 세운 평생학습원에서 제빵기술, 목공기술과 같은 실제적인 삶의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언어와 악기와 같은 것들을 열심히 배워서 제2의 인생을 위한 도전을 합니다. 한국같은 환경은 아니지만 미국도 얼마든지 인생후반기에 다양한 배움들을 도전할 수 있습니다. 매일 집에만 갇혀 지내지 말고 교회나 도서관 그리고 공원이나 데이케어와 같은 시설을 이용해서 열심히 배움의 시간을 갖는 인생후반기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인생 후반전에 더욱 경청의 삶이 필요합니다. 인생 후반전에 정말 필요한 삶은 입술은 닫고 귀는 열어야 합니다. 평생 살아왔던 인생의 많은 경험들을 인생 전반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 말을 해서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점점 세상은 변화되어서 과거의 방법이 현재의 삶에 상황적으로 매칭이 안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아직도 과거의 것들이 유용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인생 후반전을 사는 삶의 지혜는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말보다는 행동과 삶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는 꾸준한 삶의 능력이 있을 때에 인생 전반전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이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삶의 본을 보이는 능력입니다. 만일 이것들이 준비가 안된 인생 후반전의 사람들은 더욱 자신의 몸을 쳐서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을 통하여 가정을 더욱 묵상하는 기회가 됩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우리 가정은 믿음으로 잘 세워져가고 있는가 스스로 끊임없이 돌아보고 점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경 가운데 믿음의 가정들도 죄악의 문제가 반복되면서 가계도 가운데 악영향을 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가인의 죄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의 죄는 이삭의 거짓말의 죄로 유전되고 야곱의 거짓말로 발전되었습니다. 다윗의 정욕의 악한 죄는 솔로몬의 악한 정욕으로 자라서 결국은 르호보암의 충만한 정욕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위해서 부모 세대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의 삶의 본을 심어야 합니다. 매일 같이 일어나서 먼저 몸과 시간을 하나님에게 내어드리는 말씀과 기도의 삶의 본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가계도를 위해서 먼저 부모들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가계도를 위해서 먼저 부모들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의 가계도를 위해서 먼저 부모들이 순종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한사람의 희생의 본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말이 아닌 몸으로 먼저 자신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심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가계도 가운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위해서 부모 세대에서 먼저 믿음의 삶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말하는 삶의 본을 우리는 보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기초는 말의 사용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악한 말, 불신의 말, 부정적인 말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자녀들 앞에서 무심코 하는 더러운 말이 그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잘못 심겨지게 되면 믿음의 가계도를 이루는 일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무엇보다도 항상 신실한 삶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성실하고 정직한 삶으로 맡겨진 일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나눔의 삶을 살때에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위해서 다음 세대에게 우리는 투자해야 합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이어가려면 다음 세대들에게 말씀을 알고 배우고 묵상하도록 투자해야 합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이어가려면 교회를 출석하도록 가르치고 이끌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계도를 위해서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수련회의 시간을 갖도록 그리고 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투자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만시간의 법칙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1만 시간을 투자할 때에 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반복되어가는 가운데 마음과 몸에 입력된 것들이 있을 때에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반복하여 가르치고 배우고 알도록 할 때에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관계가 깨어진 교회를 중재하는 섬김의 시간을 갖았습니다. 아름다운 역사가 있었던 교회였지만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다 흩어졌고 소수의 나이드신 성도님들만 남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안에서 또 목회자와 관계가 깨어져서 하나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정황이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확인한 것은 관계가 깨어진 것은 이미 오래전 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서로 문제를 위장하고 회피하면서 많은 시간이 흘러보냈습니다. 그 결과 서로의 관계는 더 냉냉하고 서로에 대해서 적대감이 마음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진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문제를 직면하기 보다 회피합니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얼굴을 피하고 만남을 피하고 대면을 피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안전한 동굴로 들어가서 자기를 방어하려는 이기적인 본능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서 마음이 깨어진 사람들은 남들과 만나는 것들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격리하여 안전지대를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회피하는 것은 마치 병을 방치하는 것처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길입니다. 내가 방문했던 교회도 문제를 회피하다가 더욱 악화시킨 결과였습니다. 물론 관계가 악화될 때에 서로 격리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계속 회피하기 보다는 솔직하게 직면하여서 문제를 풀어가는 시작이 필요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직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혹시 나에게도 부분적으로 관계를 깬 책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교통사고가 나면 대부분 결론은 얼마이든지 쌍방 과실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완전하게 상대방 차의 잘못인 경우에는 분명한 팩트가 있는 경우입니다. 보통 인간관계의 문제는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에서 부엌에서 들으면 며느리 말이 옳지만 안방에서 들으면 시어머니 말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계를 회복하려면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대부분 약자의 입장에 서거나 피해자의 입장을 전제하면 객관적인 직면은 어렵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서 미루지 말고 직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마음에 누구에 대해서 미워하고 맺혀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본인 뿐 아니라 그 가정과 삶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들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기가 어렵다면 중재자를 내세워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오는 것을 소멸하지 말고 용기는 내어 풀고 사과하고 서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용기있게 직면하는 관계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내와 결혼한지가 올해 5월이 되면 33년이 되었습니다. 결혼 때부터 지금까지 철칙처럼 지키는 것 하나가 경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부모님이 서로 경어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에게 존칭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화가 나고 싸우실 때에는 그 불문율이 깨질 때도 있었지만 일상의 삶에서는 항상 말의 예의를 대부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시절 그런 부모님의 모습이 좀 어색하고 이상하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내 삶의 법으로 결국은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일 지라도 항상 경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거룩한 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식같은 연령의 사람이지만 그 사람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에 경어를 사용합니다. 때로는 한창 후배 목사들과 교제를 할 때에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예의를 차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이미 한 교회의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에 대한 예의를 지켜가는 이유는 인간 관계는 말로 인해서 대부분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가깝고 친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말을 하다가 관계가 힘들어지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교제할 때에 교회 용어로서 호칭을 사용하는 매너가 필요합니다. 특히 직분이 있는 사람을 부를 때에는 직분으로 호칭하는 예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모임과는 다른 주님의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과 같은 용어는 단지 직분으로서 사역을 하는 것 뿐 아니라 서로가 호칭을 통해서 사명자인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상대방에게 예의를 차려서 말 해야 합니다. 만일에 교회가 세상처럼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세상적인 용어를 쓰면서 교제를 한다면 결국 교회의 거룩한 정체성을 망가뜨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말을 할 때에 먼저 남의 말을 잘 듣는 매너가 필요합니다. 목장에서 서로 대화하면서 교제할 때에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는 매너가 필요합니다. 특히 남들이 이야기할 때에 나와 의견이 다를 경우에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매너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정치 소신을 말하면서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버려야 할 매너입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만이 마치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함부로 비판하고 부정적인 말을 확신있게 말하는 비배너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말의 매너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남을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이해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