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우선순위로 결정됩니다. 우선 순위대로 하루가 결정되고 일년이 결정되고 결국 인생이 결정됩니다. 지금 나의 우선순위는 나의 시간의 일과를 보면 압니다. 먼저 시간을 가장 많이 드리는 곳이 나의 우선순위입니다. 지금 내가 가장 많이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나의 우선순위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가치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선 가치가 있는 것이 우선 순위가 됩니다. 돈에 가치가 있는 사람은 돈을 버는 일에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지식을 소유하는 가치가 우선 순위이면 공부가 우선입니다. 가정을 우선순위로 삼으면 먼저 가정을 세우는 일에 투자할 것입니다. 가치를 따라 우리의 몸과 시간과 모든 것들이 투자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가치는 반드시 댓가를 지불하여서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에 대해 어떤 관점일까요? 예수님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인 하나님의 나라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의 하나님 나라 다음은 통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에서 1차적으로 예수님이 강조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땅에 임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각자의 마음, 가정, 직장, 교회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는 미래에 경험할 천국을 이미 여기에서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물론 그날에 비해 다소 불완전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지금의 천국은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신령한 하나님의 모든 복을 풍성하게 맛보게 됩니다. 대개 그 하나님의 주시는 복들은 세상의 소유와 복을 초월한 인간의 노력으로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인도의 복들입니다.

예수님의 기준대로 우선순위의 삶을 살 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치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가치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먼저 구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의이신 말씀을 가치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그 능력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그 생명의 말씀이 삶을 풍성하게 해줄 것입니다.

신년이 되어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우선순위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시작은 무엇일까요? 나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매일 매일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더욱 온전하게 높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서 우리가 받은 가정 일터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21세기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누가 진짜인가? 누가 가짜인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성령의 사역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속기가 쉽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미 초대교회 당시에도 심각했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령의 참된 사역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믿지 말고 분별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에 거짓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200년 전에 요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거짓된 부흥, 거짓된 역사들을 통해서 마치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우리가 속을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우선 사람들의 육신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날 때라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육체의 떨림이나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울거나 쓰러지거나 괴성을 지르는 현상들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종종 성령 집회라고 하는 곳에서 집단적으로 소리를 크게 지르게 합니다. 그리고 뒤로 사람을 넘어뜨리게 하는 사역을 하기도 합니다. 괴성을 지르면서 감정을 고양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보이는 육체적인 현상들은 성령님이 아닌 사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영혼에 어떤 각성과 변화도 없다면 실로 거짓된 일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내면의 영혼 속에 각성을 주어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떠나게 하고 평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향하여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음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성경에 보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올 때에 애굽의 마술사들도 몇가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마귀에 의한 역사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여서 믿는 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강조하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지선지자들을 경계하면서 마 7장 22절에서 그날에 주님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는 초자연적적인 기사를 통해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 충족성을 무시하고 지금도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성령충만한 사람들을 보면 성령이 충만하면 말씀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거짓된 성령운동을 통하여 헛된 부흥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치우치게 만들고 편향된 한쪽 방향으로 몰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이성과 지성을 통하여 일어나는 깊은 깨달음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시합니다. 그 결과 교회를 무조건 뜨겁게 가야 하고 큰 소리의 기도와 더불어 감정적인 느낌을 앞세우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받은 자기의 결론은 성경보다도 우위에 서게 됩니다. 그것으로 모든 잣대의 기준을 삼으면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위 글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구상의 ‘새해’라고 하는 시의 일부의 내용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새로운 일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 밖에서 일어나는 새 일을 기대하기 보다 먼저 내 안에서 내가 새로와지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잠언서의 기자 솔로몬의 고백처럼 해 아래 새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새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있었던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선 마음이 새로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봅니다. 문제는 마음이 더러워져 있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사람과 소통할 수 없고 관계가 어렵습니다.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높은 마음이 낮은 마음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좁은 마음이 넓은 마음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닫힌 마음이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변화되지 않는 묵은 마음을 통해 마귀가 일하고 죄만 더해지게 됩니다.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듯이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다음, 말이 새로와져야 합니다. 먼저 권위주의적인 자기 중심의 말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내 말은 정답은 아닙니다. 내 말은 항상 옳을 수 없습니다. 남을 조종하고 지시하고 통제하고 명령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다음 상대방을 무시하는 오만한 말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지식을 앞세운 오만함, 나이를 앞세운 거만함, 지위를 앞에 둔 방자함, 신앙을 앞세운 버릇없음의 말로 내가 주장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전부를 알고 다 경험한 것 같은 교만한 자세로 남을 주장하려고 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의 얼굴입니다. 거친 말은 거친 인격을 보여줍니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인격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새사람답게 말을 해야 합니다. 천국의 새언어는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입니다. 새사람다운 새말의 습관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행동이 새로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게으름을 버리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미지근함을 버리고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무책임을 버리고 성실한 책임을 회복해야 합니다. 포기하는 행동을 멈추고 인내하고 끈기있는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곳에 열매가 있고 행동하는 곳에 주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 속에 행동이 보여질 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이 되어 선도하게 됩니다.

새해에는 마음과 말과 행동이 새로와져서 나를 통하여 주변이 새로와지는 변화의 도구가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새해를 여는 기도

박춘수

새해에는 이렇게 살게 하소서

새해에는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
주의 새로운 말씀을 보게 하소서
쌓인 욕심으로 닫힌 눈의
비늘이 떨어지게 하셔서
맑은 호수 같은 눈동자로
주님의 맑은 말씀들을
새롭게 보게 하소서

새해에는
우리의 막힌 귀를 열어
주의 깊은 말씀을 듣게 하소서
세상의 소리에 익숙한 귀의
세포가 딿아지게 하셔서
영롱한 새소리 같은 음성으로
주님의 정결한 말씀들을
기쁘게 듣게 하소서

새해에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열어
주의 신비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세상 지혜로 채워진 마음의
어리석음을 알게 하시어
가장 크고 신비한 하늘의 지혜로
주님의 깊은 말씀들을
귀하게 깨닫게 하소서

새해에는
우리의 게으른 몸을 깨워
주의 능력의 말씀을 행하게 하소서
죄로 잠자는 굳은 몸의
체질을 새롭게 힘을 주시어
가장 신속하고 힘있게 행하는 삶으로
주님의 권능의 제자가 되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1년을 묵상하면 어제 같았던 한 해였습니다. 한해 가운데 여기까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건,사고의 해를 당하지 않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자리를 지키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교회의 한 해를 묵상하면서 감사와 더불어 아쉬움이 교차 되어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첫째, 지난 1년 가운데 교회적으로 가장 감사할 것은 단기선교의 실천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격년마다 해외 단기선교를 실천하고 있는데 올해가 바로 그 해였습니다. 2 년 전에 갔던 헤이티에 다시 한번 단기 선교를 통해서 교회적으로는 선교의 현장 경험과 더불어 중장기적으로 교회의 선교 정책을 펴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선교에 대한 의식과 도전에 대해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성도들이 선교현장의 도전과 체험을 통해서 교회가 선교의 지경을 넓혀갔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지속적인 말씀훈련과 제자훈련을 통한 내실을 다질 수 있는 한 해였던 것을 감사합니다. 특히 올해는 매주 설교의 핵심 성경 요절을 한절씩 암송하게 하여 1년 약 52개의 요절을 암송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감사한 것은 분기에 1회 요절암송대회를 한 결과 다수의 성도들이 너무 열심히 성경 요절을 암송하는 일에 참여하여 주었습니다. 어쩌면 수 십 년 평생 신앙생활을 한 가운데 외우지 못했던 성경 말씀을 올해 가장 많이 암송하는 한 해가 되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지속적인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의 젊은 층들이 영적 성숙의 도전과 경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20-30대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건강한 영성을 훈련 받을 때에 앞으로의 중년기 이후의 삶을 믿음으로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젊은 층들의 제자훈련 참여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젊은 층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한 양육과 훈련을 통해서 건강한 영성을 세워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지난 한해 시간 가운데 아기들이 번식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교회의 젊은 가정들이 아기들을 출산하여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전도가 힘들고 점점 고령화 되어가는 교회의 현실 속에서 아기들의 출생은 너무나도 큰 축복입니다. 아기들이 없어 아기 웃음과 울음이 떠난 교회들은 분위기가 쓸쓸합니다. 그러나 아기들로 인해 그들의 웃음과 울음 그리고 귀여운 행동은 교회에 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회가 더욱 젊은 가정들을 통해서 번식의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2015년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교회의 우선적인 과제는 새로운 교회당 장소의 무빙을 실천되기를 기대합니다. 그와 아울러 새로운 교회 역사의 전환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내적인 사역과 외적인 사역의 지경을 넓혀서 하나님 나라를 더 확장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됩니다. 요즈음 낮의 온도는 마치 봄 날 같아서 심지어 벚꽃이 피고 개나리가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겨울같지 않는 12월이지만 어김없이 올해 크리스마스는 우리 앞에 왔습니다. 이미 거리의 집집마다 밤을 밝히고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츄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밝힙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점점 크리스마스를 축복하는 인사가 사라지고 전세계적인 성탄을 축하하는 분위기도 조심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우선 올해 미국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가 사라지고 대신에 ‘즐거운 휴일 (해피 할러데이’인사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가 점점 주류를 이룬다고 합니다.그래서 오바마 미 대통령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하는 연설에서 해피 할러데이‘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공공장소에 설치했던 성탄 축하하는 츄리나 장식을 이제는 점점 설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커피 전문업체인 스타벅스 에서는 해마다 성탄절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무뉘를 컵에 새겨 넣던 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다른 종교의 명절도 있는데 유독히 기독교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강조하는 것이 종교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화려한 장식과 들 뜬 인사로 맞이하는 것이 꼭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적으로는 전혀 믿음도 없으면서 외적으로 장식을 한다고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려한 장식을 했다고 우리의 신앙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기쁨 보다는 단순한 기념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기쁨을 갖지 못한 채로 주변의 분위기에 동요되어 예수님과 관련없는 헛된 장식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내적 기쁨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의미있는 기쁨의 장식으로 잘 표현되어지는 메리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믿음의 삶의 기쁨은 날마다의 삶이 메리 크리스마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최대의 주님을 기념하는 행위입니다.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도 내 삶이 주님을 나타내는 장식이 되고 내 삶이 주님을 기념하는 기념이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고 속박하였던 마귀에서 풀려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날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믿으면서 인도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없다면 그 어떤 크리스마스의 장식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2015년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주안에서 나의 주님을 경험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회복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한국 대중 가요 중에 ‘100세 인생’이라고 하는 노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 노래의 인기 이유는 곡도 좋지만 재미있는 가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육 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당당히 육십 인생은 죽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라고 표현합니다. 하기사 요즘 한국 여성의 평균 수명은 85세 내외이고 남성은 78세 내외입니다. 육십을 놓고 볼 때에 최소한 남은 생애가 평균 20년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앞으로 유행가 가사처럼 100세 인생을 사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100세 인생을 놓고 보면 60은 여전히 살 수 있는 날이 많은 날입니다. 나의 지인 중에는 인생 육십의 나이에도 오히려 젊은 사람 이상으로 멋있는 인생을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2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젊은 세대들과 운동도 잘 합니다. 또 분명히 나이 차이가 있는 데도 젊은 세대와 대화와 교제를 해도 전혀 벽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통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변화하는 세대의 흐름을 더 잘 알고 대화하고 도전하면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스스로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젊은 마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배움에 도전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의 모습 속에서는 중후한 인격과 더불어 삶의 실제적인 능력을 겸비한 인생의 멋이 배어나옵니다.

반면에 100세 인생 앞에서 육십의 인생이 너무 조로하신 분도 있습니다. 노년의 어른 모습으로만 있으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남의 이야기를 도무지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마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입니다. 아랫 사람을 섬기고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보다는 높임을 받고 대접만 받으려고 합니다.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고 과거 옛날 이야기만 합니다. 결국 이런 분들과 만나면 재미가 없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모임은 무미건조한 형식적인 모임이 되고 맙니다.

100세의 멋스러운 노년의 인생을 위해 열심히 투자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알았던 것들을 더 깊게 알기 위해서 더 공부해야 합니다. 새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더 공부하고 더 도전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야지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서 내가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꾸 모든 것을 젊은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도움만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변화하는 세상의 컴퓨터, 스마트 폰 기계를 위한 기술에 대해서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도 더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더 공부하는 자세로 신문도 더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주변의 배울 수 있는 채널들을 찾아서 자꾸 나를 연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를 위해서도 더 열심히 운동 해야 합니다. 인생의 멋은 스스로 가꾸고 훈련하여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가꾸고 배우고 노력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멋없는 인생이 되어 인생의 살맛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더 멋있는 인생으로 가꾸어 맛있는 인생으로 더 풍성하게 보내는 삶으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점점 어른이 되면서 사람들은 관계 속에 상처를 받으면서 마음의 병이 생깁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점점 좁아지고 굳어진 가운데 마음 의 벽이 생기면서 점점 사람과의 소통을 막게 됩니다. 마음의 벽이 생기면 삶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낮은 자존감이 생기게 되면서 더욱 남과 소통이 어렵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의 벽으로 생긴 낮은 자존감의 사람들은 잘못된 소통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선은 온 몸을 갑옷을 입고 스스로 방어합니다.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닫고 단단히 나를 무장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항상 활에 살을 준비하여 남을 공격하기를 반복하는 삶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스스로의 낮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먼저 남을 공격하면서 나를 지켜가고자 합니다. 이렇게 수비용 무기이든 공격용 무기이든 사용하면 할수록 결국 남에게 또 상처를 주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의 벽이 있는 사람은 내가 받은 상처만 기억하고 내가 남에게 주는 상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벽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상처 안에 갇혀 있기에 남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벽으로 상처에 갇혀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심지어는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이 일으키는 가정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에서 자신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항상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상처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을까요?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을 하나님의 목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요구됩니다. 요셉은 17세에 팔려서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 외국에 종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억울하게 감옥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환경을 원망하고 탓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에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형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상처의 과정을 허락하셨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기에 자신을 버리고 판 형제들을 향해 원수를 갚지 않고 선을 베풀면서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자꾸 우리의 마음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나쁜 감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과거로 돌아가서 악한 감정대로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오직 나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듯이 나도 남을 용서하고 나를 주님의 뜻대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겸손하게 받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닮고 배워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2:5).

지난 주일 목장 모임 시간에는 제자훈련 사역자 반에 있는 3명이 목장 인도 실습 시간을 갖았습니다. 임시 목자가 되어서 2시간 여에 걸친 목장 인도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리더쉽을 목원들에게 평가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각 목장마다 20개의 질문의 질문지를 나누어주고 각 분야에 걸쳐서 평가를 하였습니다. 평가의 결과는 은혜 안에서 객관성을 갖고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부정적인 평가도 서슴없이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평가지를 각자에게 돌려주고 난 후에 제자훈련 시간에 자기 점검의 시간을 갖는 기회를 갖으면서 리더쉽 시험의 시간을 갖았습니다
우선 교회 리더는 교회 공동체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리더를 볼 때 먼저 그 배경을 봅니다. 그의 영성의 삶, 가정 생활, 일상생활이 어떤 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흠이 없는 사람을 세우려고 합니다. 물론 누구든지 100%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믿음과 말과 생활에 흠이 없는 인정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 화려한 말은 있지만 내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쁜 습관과 함부로 말을 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 성품은 좋지만 실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남들을 이끌기에 한계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리더가 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변화된 인격과 더불어 실제적인 능력도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교회의 집사와 감독과 같은 공인된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 우선 강조하는 기준이 개인적인 인격과 능력입니다. 딤후3장에 보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라고 합니다. 집사의 기준을 보면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리더를 세우기 위해서 먼저 시험하여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세우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교회 리더를 세우는 데 있어서 다수 구체적인 인격과 삶의 기준을 강조하는가 하면 그만큼 리더의 자리는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리더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 스스로도 사모함을 갖고 자신을 흠이 없도록 개발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도 세워지는 리더를 격려하면서 키워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면서부터 리더는 없습니다. 훈련 속에서 개발되어지고 함께 키워지는 것입니다. 단지 제자훈련 같은 공식적인 시간 뿐 아니라 예배와 기도와 소그룹 모임 모든 사역 시간들을 통해서 리더쉽은 체험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키워지고 개발되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30-40대의 중년의 리더들을 잘 키워야 합니다. 본인들도 노력해야 하지만 교회도 함께 관심을 갖고 저들이 온전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격려하고 지지하여 주기를 소원합니다.

과거 한국교회에서는 90년대 까지만 해도 부흥회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주기적으로 부흥회를 교회의 연례행사로 하면서 신앙의 부흥을 되새기는 기회를 갖곤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마다 기대했던 부흥회에 대한 감동들이 시들해지면서 요즘에는 부흥회를 해도 이전처럼 인기가 없습니다. 이제는 교회연합회들이 주관하는 연합 부흥회도 자리를 채우는 일이 고민이 될 정도로 부흥회가 시들해졌습니다.
이렇게 부흥회가 시들해진 우선적인 요인은 준비되지 못한 부흥사들의 질 떨어지는 설교가 우선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성경 본문과는 별도의 간증이나 예화로 감동을 유발하려고 하거나 무리하게 아멘과 박수를 유발하는 분위기 조장은 결국 회중들에게 거부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특히 부흥회를 통하여 무리하게 헌금을 작정하거나 내도록 함으로써 오히려 건전한 신앙생활을 깨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과거의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흥회는 여전히 필요하고 잘 개최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 성경적인 설교와 더불어 본래의 목적대로 신앙의 부흥을 위하여 열어져야 합니다. 사실 본 교회의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 교회 목회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교회 목회자가 자신의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부흥회를 여는 것은 그렇게 교회들마다 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익히 서로 잘 알고 있기에 기대감을 갖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고 또 아는 만큼 제대로 쓴 소리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자신들의 형편과 정황을 잘 아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부흥회를 가짐으로써 영적인 부흥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심적인 인물이 에스라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부흥을 위하여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느헤미야 8장에 소개되는 에스라의 부흥회를 보면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백성들 목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때에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듣고 울면서 회개하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흥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요즘 미국의 이민교회를 보면 영적인 침체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영적인 암흑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표징은 전도가 어렵고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분열과 싸움으로 교회가 사분오열되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외적으로 내적으로 힘든 교회의 상황에서 다시 교회는 영적인 부흥을 필요로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거룩한 부흥의 소원함을 갖고 부흥회를 통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거룩한 열정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가 함께 교회 부흥회를 갖으면서 개인적으로 공통체적으로 열정과 소원함을 갖고 신앙의 부흥를 소원하는 우리의 신앙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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