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1년을 묵상하면 어제 같았던 한 해였습니다. 한해 가운데 여기까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건,사고의 해를 당하지 않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자리를 지키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교회의 한 해를 묵상하면서 감사와 더불어 아쉬움이 교차 되어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첫째, 지난 1년 가운데 교회적으로 가장 감사할 것은 단기선교의 실천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격년마다 해외 단기선교를 실천하고 있는데 올해가 바로 그 해였습니다. 2 년 전에 갔던 헤이티에 다시 한번 단기 선교를 통해서 교회적으로는 선교의 현장 경험과 더불어 중장기적으로 교회의 선교 정책을 펴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선교에 대한 의식과 도전에 대해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성도들이 선교현장의 도전과 체험을 통해서 교회가 선교의 지경을 넓혀갔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지속적인 말씀훈련과 제자훈련을 통한 내실을 다질 수 있는 한 해였던 것을 감사합니다. 특히 올해는 매주 설교의 핵심 성경 요절을 한절씩 암송하게 하여 1년 약 52개의 요절을 암송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감사한 것은 분기에 1회 요절암송대회를 한 결과 다수의 성도들이 너무 열심히 성경 요절을 암송하는 일에 참여하여 주었습니다. 어쩌면 수 십 년 평생 신앙생활을 한 가운데 외우지 못했던 성경 말씀을 올해 가장 많이 암송하는 한 해가 되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지속적인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의 젊은 층들이 영적 성숙의 도전과 경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20-30대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건강한 영성을 훈련 받을 때에 앞으로의 중년기 이후의 삶을 믿음으로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젊은 층들의 제자훈련 참여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젊은 층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한 양육과 훈련을 통해서 건강한 영성을 세워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지난 한해 시간 가운데 아기들이 번식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교회의 젊은 가정들이 아기들을 출산하여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전도가 힘들고 점점 고령화 되어가는 교회의 현실 속에서 아기들의 출생은 너무나도 큰 축복입니다. 아기들이 없어 아기 웃음과 울음이 떠난 교회들은 분위기가 쓸쓸합니다. 그러나 아기들로 인해 그들의 웃음과 울음 그리고 귀여운 행동은 교회에 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회가 더욱 젊은 가정들을 통해서 번식의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2015년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교회의 우선적인 과제는 새로운 교회당 장소의 무빙을 실천되기를 기대합니다. 그와 아울러 새로운 교회 역사의 전환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내적인 사역과 외적인 사역의 지경을 넓혀서 하나님 나라를 더 확장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됩니다. 요즈음 낮의 온도는 마치 봄 날 같아서 심지어 벚꽃이 피고 개나리가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겨울같지 않는 12월이지만 어김없이 올해 크리스마스는 우리 앞에 왔습니다. 이미 거리의 집집마다 밤을 밝히고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츄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밝힙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점점 크리스마스를 축복하는 인사가 사라지고 전세계적인 성탄을 축하하는 분위기도 조심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우선 올해 미국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가 사라지고 대신에 ‘즐거운 휴일 (해피 할러데이’인사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가 점점 주류를 이룬다고 합니다.그래서 오바마 미 대통령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하는 연설에서 해피 할러데이‘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공공장소에 설치했던 성탄 축하하는 츄리나 장식을 이제는 점점 설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커피 전문업체인 스타벅스 에서는 해마다 성탄절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무뉘를 컵에 새겨 넣던 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다른 종교의 명절도 있는데 유독히 기독교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강조하는 것이 종교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화려한 장식과 들 뜬 인사로 맞이하는 것이 꼭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적으로는 전혀 믿음도 없으면서 외적으로 장식을 한다고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려한 장식을 했다고 우리의 신앙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기쁨 보다는 단순한 기념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기쁨을 갖지 못한 채로 주변의 분위기에 동요되어 예수님과 관련없는 헛된 장식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내적 기쁨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의미있는 기쁨의 장식으로 잘 표현되어지는 메리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믿음의 삶의 기쁨은 날마다의 삶이 메리 크리스마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최대의 주님을 기념하는 행위입니다.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도 내 삶이 주님을 나타내는 장식이 되고 내 삶이 주님을 기념하는 기념이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고 속박하였던 마귀에서 풀려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날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믿으면서 인도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없다면 그 어떤 크리스마스의 장식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2015년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주안에서 나의 주님을 경험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회복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한국 대중 가요 중에 ‘100세 인생’이라고 하는 노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 노래의 인기 이유는 곡도 좋지만 재미있는 가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육 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당당히 육십 인생은 죽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라고 표현합니다. 하기사 요즘 한국 여성의 평균 수명은 85세 내외이고 남성은 78세 내외입니다. 육십을 놓고 볼 때에 최소한 남은 생애가 평균 20년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앞으로 유행가 가사처럼 100세 인생을 사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100세 인생을 놓고 보면 60은 여전히 살 수 있는 날이 많은 날입니다. 나의 지인 중에는 인생 육십의 나이에도 오히려 젊은 사람 이상으로 멋있는 인생을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2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젊은 세대들과 운동도 잘 합니다. 또 분명히 나이 차이가 있는 데도 젊은 세대와 대화와 교제를 해도 전혀 벽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통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변화하는 세대의 흐름을 더 잘 알고 대화하고 도전하면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스스로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젊은 마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배움에 도전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의 모습 속에서는 중후한 인격과 더불어 삶의 실제적인 능력을 겸비한 인생의 멋이 배어나옵니다.

반면에 100세 인생 앞에서 육십의 인생이 너무 조로하신 분도 있습니다. 노년의 어른 모습으로만 있으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남의 이야기를 도무지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마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입니다. 아랫 사람을 섬기고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보다는 높임을 받고 대접만 받으려고 합니다.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고 과거 옛날 이야기만 합니다. 결국 이런 분들과 만나면 재미가 없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모임은 무미건조한 형식적인 모임이 되고 맙니다.

100세의 멋스러운 노년의 인생을 위해 열심히 투자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알았던 것들을 더 깊게 알기 위해서 더 공부해야 합니다. 새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더 공부하고 더 도전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야지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서 내가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꾸 모든 것을 젊은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도움만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변화하는 세상의 컴퓨터, 스마트 폰 기계를 위한 기술에 대해서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도 더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더 공부하는 자세로 신문도 더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주변의 배울 수 있는 채널들을 찾아서 자꾸 나를 연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를 위해서도 더 열심히 운동 해야 합니다. 인생의 멋은 스스로 가꾸고 훈련하여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가꾸고 배우고 노력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멋없는 인생이 되어 인생의 살맛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더 멋있는 인생으로 가꾸어 맛있는 인생으로 더 풍성하게 보내는 삶으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점점 어른이 되면서 사람들은 관계 속에 상처를 받으면서 마음의 병이 생깁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점점 좁아지고 굳어진 가운데 마음 의 벽이 생기면서 점점 사람과의 소통을 막게 됩니다. 마음의 벽이 생기면 삶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낮은 자존감이 생기게 되면서 더욱 남과 소통이 어렵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의 벽으로 생긴 낮은 자존감의 사람들은 잘못된 소통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선은 온 몸을 갑옷을 입고 스스로 방어합니다.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닫고 단단히 나를 무장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항상 활에 살을 준비하여 남을 공격하기를 반복하는 삶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스스로의 낮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먼저 남을 공격하면서 나를 지켜가고자 합니다. 이렇게 수비용 무기이든 공격용 무기이든 사용하면 할수록 결국 남에게 또 상처를 주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의 벽이 있는 사람은 내가 받은 상처만 기억하고 내가 남에게 주는 상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벽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상처 안에 갇혀 있기에 남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벽으로 상처에 갇혀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심지어는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이 일으키는 가정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에서 자신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항상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상처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을까요?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을 하나님의 목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요구됩니다. 요셉은 17세에 팔려서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 외국에 종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억울하게 감옥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환경을 원망하고 탓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에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형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상처의 과정을 허락하셨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기에 자신을 버리고 판 형제들을 향해 원수를 갚지 않고 선을 베풀면서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자꾸 우리의 마음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나쁜 감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과거로 돌아가서 악한 감정대로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오직 나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듯이 나도 남을 용서하고 나를 주님의 뜻대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겸손하게 받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닮고 배워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2:5).

지난 주일 목장 모임 시간에는 제자훈련 사역자 반에 있는 3명이 목장 인도 실습 시간을 갖았습니다. 임시 목자가 되어서 2시간 여에 걸친 목장 인도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리더쉽을 목원들에게 평가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각 목장마다 20개의 질문의 질문지를 나누어주고 각 분야에 걸쳐서 평가를 하였습니다. 평가의 결과는 은혜 안에서 객관성을 갖고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부정적인 평가도 서슴없이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평가지를 각자에게 돌려주고 난 후에 제자훈련 시간에 자기 점검의 시간을 갖는 기회를 갖으면서 리더쉽 시험의 시간을 갖았습니다
우선 교회 리더는 교회 공동체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리더를 볼 때 먼저 그 배경을 봅니다. 그의 영성의 삶, 가정 생활, 일상생활이 어떤 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흠이 없는 사람을 세우려고 합니다. 물론 누구든지 100%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믿음과 말과 생활에 흠이 없는 인정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 화려한 말은 있지만 내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쁜 습관과 함부로 말을 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 성품은 좋지만 실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남들을 이끌기에 한계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리더가 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변화된 인격과 더불어 실제적인 능력도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교회의 집사와 감독과 같은 공인된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 우선 강조하는 기준이 개인적인 인격과 능력입니다. 딤후3장에 보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라고 합니다. 집사의 기준을 보면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리더를 세우기 위해서 먼저 시험하여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세우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교회 리더를 세우는 데 있어서 다수 구체적인 인격과 삶의 기준을 강조하는가 하면 그만큼 리더의 자리는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리더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 스스로도 사모함을 갖고 자신을 흠이 없도록 개발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도 세워지는 리더를 격려하면서 키워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면서부터 리더는 없습니다. 훈련 속에서 개발되어지고 함께 키워지는 것입니다. 단지 제자훈련 같은 공식적인 시간 뿐 아니라 예배와 기도와 소그룹 모임 모든 사역 시간들을 통해서 리더쉽은 체험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키워지고 개발되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30-40대의 중년의 리더들을 잘 키워야 합니다. 본인들도 노력해야 하지만 교회도 함께 관심을 갖고 저들이 온전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격려하고 지지하여 주기를 소원합니다.

과거 한국교회에서는 90년대 까지만 해도 부흥회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주기적으로 부흥회를 교회의 연례행사로 하면서 신앙의 부흥을 되새기는 기회를 갖곤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마다 기대했던 부흥회에 대한 감동들이 시들해지면서 요즘에는 부흥회를 해도 이전처럼 인기가 없습니다. 이제는 교회연합회들이 주관하는 연합 부흥회도 자리를 채우는 일이 고민이 될 정도로 부흥회가 시들해졌습니다.
이렇게 부흥회가 시들해진 우선적인 요인은 준비되지 못한 부흥사들의 질 떨어지는 설교가 우선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성경 본문과는 별도의 간증이나 예화로 감동을 유발하려고 하거나 무리하게 아멘과 박수를 유발하는 분위기 조장은 결국 회중들에게 거부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특히 부흥회를 통하여 무리하게 헌금을 작정하거나 내도록 함으로써 오히려 건전한 신앙생활을 깨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과거의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흥회는 여전히 필요하고 잘 개최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 성경적인 설교와 더불어 본래의 목적대로 신앙의 부흥을 위하여 열어져야 합니다. 사실 본 교회의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 교회 목회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교회 목회자가 자신의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부흥회를 여는 것은 그렇게 교회들마다 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익히 서로 잘 알고 있기에 기대감을 갖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고 또 아는 만큼 제대로 쓴 소리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자신들의 형편과 정황을 잘 아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부흥회를 가짐으로써 영적인 부흥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심적인 인물이 에스라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부흥을 위하여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느헤미야 8장에 소개되는 에스라의 부흥회를 보면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백성들 목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때에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듣고 울면서 회개하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흥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요즘 미국의 이민교회를 보면 영적인 침체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영적인 암흑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표징은 전도가 어렵고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분열과 싸움으로 교회가 사분오열되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외적으로 내적으로 힘든 교회의 상황에서 다시 교회는 영적인 부흥을 필요로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거룩한 부흥의 소원함을 갖고 부흥회를 통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거룩한 열정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가 함께 교회 부흥회를 갖으면서 개인적으로 공통체적으로 열정과 소원함을 갖고 신앙의 부흥를 소원하는 우리의 신앙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인생을 비유할 때에 등산에 비유합니다.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과정과 인생의 여정은 너무나도 유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등산은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쉬울 것 같지만 작은 산이든 높은 산이든 등산은 결코 만만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산과 함께 지내는 것이 익숙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때에는 스카웃 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유명한 산들을 등반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산이든 고유한 아름다움과 함께 특유의 위험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등산은 항상 기쁨도 있지만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잘 준비된 등반객들에게는 기쁨이 배가되지만 잘 준비되지 못한 산행은 위험과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위험을 줄이고 기쁜 등산을 위해서 최소한 3가지의 중요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 등산은 정상의 정복의 기쁨도 중요하지만 정상을 도달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정상에 머무르는 시간은 너무나도 단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정상에 오르는 과정의 시간은 깁니다. 문제는 정산만 바라보면 산행의 기쁨은 너무나도 작습니다. 그러나 산행의 과정을 즐기면서 더 길고 아름다운 산행의 시간을 갖을 수 있습니다.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그 과정을 즐겨야 합니다. 길가의 나무와 꽃을 보고 또 새소리를 듣고 시원한 공기를 맡으면서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다양함을 보면서 그 다양함의 기쁨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이루는 정복도 중요하지만 그 정복의 과정에 이르는 노력과 수고가 더 아름답습니다. 결국 등산을 통해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는 과정에 충실할 수록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등산은 사소하고 민감한 준비를 잘 할 때에 산행의 기쁨과 정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통 산을 오르고 내려올 때에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준비하지 못해서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은 나의 경우에 면 양말을 신지 않고 등산화를 신었다가 길을 걸으면서 많이 불편했습니다. 신발을 산행에 걸맞지 않는 것을 신었다고 힘든 경험도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실 물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중간에 떨어져서 힘들었던 경험도 있습니다. 너무 두꺼운 옷을 입었다가 너무 더워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고 너무 얇은 옷을 입었다고 추워서 혼난 경험도 있습니다. 응급약이 없어서 갑자기 어려움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보통 우리 인생에서 사소하게 여겨지는 작은 것들을 무시하다가 그 댓가를 톡톡하게 치룰 때가 많습니다. 결국 등산이나 인생의 기쁨은 마음과 몸과 모든 것이 잘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셋째, 등산은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할 지라도 무시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조심스럽게 할 때에 안전하게 잘 할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는 순간에 찾아옵니다. 작은 산일지라도 결코 소홀하고 여기면 안됩니다. 산은 인생의 교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등산을 오래한 경험자들은 항상 산을 대할 때마다 정복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겸손한 순례객으로서 대합니다. 사소하게 여기는 산행에서 순간 방심하면 사고를 당하여 오랫동안 그 해를 당하게 됩니다. 특히 산을 올라갈 때에도 중요하지만 하산할 때에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방심하여 긴장을 풀고 걷게 되면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것도 만만한 것이 없듯이 우리의 산행도 낮은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맞는 사계절은 인생의 주기에 흔히들 비유합니다. 싱그런 생명의 계절 봄은 인생의 준비기인 소년기라고 한다면 무더운 더위의 계절 여름은 열정의 청년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열매의 계절 가을은 인생의 열매를 맺는 장년기에 비유되고 추위의 계절 겨울은 인생의 노년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계절은 저마다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매의 계절 가을은 한해의 수고를 결정짓는 때임으로 너무나도 큰 의미의 시간이 됩니다. 가을의 백미는 열매입니다.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맺을 때에 사과 나무는 존재의 목적을 완성하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우리 인생도 열매를 맺어야 인생의 존재의 기쁨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가을을 맞고 열매의 결산을 해야 합니다. 최소 50대가 되면 지금까지 내가 뿌린 인생의 씨앗들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보통 한 사람이 초등학교에서 대학교를 다니거나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공부하는 시간은 길게는 20년 짧게는 12-3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자기 분야의 일을 하거나 경험을 하는 시간들이 50대가 되면 최소 10년 이상이 됩니다. 나의 경우만 해도 공부하는 데 걸린 시간이 50을 기준으로 보면 최소 25년 이상이 공부의 시간이었고 벌써 목사안수를 받고 것도 20년을 더 넘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고 여전히 목사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었는가를 돌아보면 아직도 부끄러움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 열매를 맺는 가지는 본체에 잘 붙어있으면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가지인 우리는 본체이신 예수님에게 잘 속하여 있으면 때가 될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날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구체적인 일은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주님을 관계하는 것입니다. 주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주님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주안에 거하는 길은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만이 열매 맺는 길입니다.

인생 50대의 장년기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닮은 장성한 분량의 인격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가장 좋은 열매는 주님을 닮은 것입니다. 말과 행동과 마음이 주님 닮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50대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어른아이의 말을 넘어서서 어른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그 핵심은 배려와 덕스러움입니다. 50대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어른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 핵심은 섬김과 나눔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나를 넘어 이웃을 위해 나눔과 섬김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50대 이상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너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욱 비젼을 갖고 소망으로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가을의 열매는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풍성함을 선물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거두는 열매는 한 사람을 너머 많은 이들에게 풍성한 기쁨을 선사합니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열매 맺는 한 사람의 가치가 이와 같습니다. 인생의 가을을 잘 맞이하는 50대 이상의 어떤 분들은 맺은 열매로 주변인들에게 많은 기쁨을 줍니다. 그 분의 훌륭한 인격과 넉넉한 믿음은 만나는 이들에게 영향력을 선사합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 속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하고 유용한 존재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지금 당신은 열매를 잘 맺고 있습니까?

나의 믿음생활에서 가장 잊지 못할 훈련은 당연히 성경 요절을 암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네비게이토에서 나오는 성경 요절 암송 카드가 있었습니다. 나는 20대 중후반 시절 그것을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성경을 암송했습니다. 때로는 화장실과 나의 책상 앞에 놓고 수시로 암송했습니다. 혼자 길을 걸을 때에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때로는 공부하는 중에 말씀을 암송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때에 암송 말씀은 내 안에 기록되어져 나의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성경 요절 암송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나의 생각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 내가 반복해서 암송했던 말씀은 나의 마음의 독기를 제거하여 주었습니다. 젊음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조급함과 인생에 대한 불안감을 제거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인생길에 대한 불안감을 믿음과 비젼으로 바꾸어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주의 말씀이 내 길에 빛이요 내 발에 등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하게 하고 천국에 대해서 소망을 갖게 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단련하여 강건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의 의지를 굳게 하여 주었습니다.

매일 저녁이면 암송하는 성경 말씀의 은혜를 일기로 기록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암송되는 성경 말씀의 은혜는 매일 다양하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되어지는 일기를 통해서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놀라운 능력을 공급하시는 말씀의 하나님이신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말씀의 능력은 세상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죽게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 살게 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들어서 우리 교회는 성경 암송을 통해서 말씀의 영성을 회복하는 훈련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까지 2번의 대회를 거쳐서 매주 반복되는 주보의 성경 요절을 다같이 암송하면서 성경을 마음에 채우는 시간을 갖았고 이제 오늘 주일은 3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벌써 2회 동안 최소한 24개 이상을 암송했습니다. 만일 오늘까지 다 암송하면 36구절 이상을 암송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평생에 암송하지 못했던 성경요절을 올 한 해에 더 외우는 기회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복하면서 정확하고 분명하게 암송하면 마음에 기록이 되고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영혼과 골수를 새롭게 하는 능력의 말씀으로 활동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마음에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면 그 말씀의 능력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떤 형식과 체험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말씀을 암송하면서 마음에 의지하고 믿는 말씀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변화하는 세대에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암송을 통해서 말씀의 영성이 더욱 회복되는 우리가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 ‘암살’ 영화를 보았습니다. 모처럼 감동을 느낀 좋은 영화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한 것도 있고, 탄탄한 영화 구성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일본에 대한 상처를 후련하게 씻어주는 광복군들의 빛나는 조국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하여 아까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었습니다. 어쩌면 광복 70주년을 맞은 지금 대한민국은 그들의 생명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비록 몸은 미국에 있지만 대한민국을 모국으로 갖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40대 후반에 살던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올 때에 어떤 목사님이 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왜 좋은 나라를 버리고 힘든 외국에 가서 살려고 하는가?” 였습니다. 그때 나는 “나는 내 나라를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몸은 비록 이 땅을 떠나지만 어디에 가 있든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몸은 우리나라 땅을 떠나 있지만 오히려 미국에 살면서 내면적으로는 우리나라에 대한 마음과 관심은 한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물론 광복군처럼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깊은 골수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가끔 내가 만나는 테니스 게임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인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우리나라를 아느냐거 묻곤 합니다. 그런데 그둘 중에 상당수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설픈 영어로 우리나라 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김치나 불고기 같은 음식에 대하여, 우리나라 삼성이나 엘지같은 회사의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설명을 하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대단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마음이 뿌듯합니다. 분명히 이제는 우리나라가 선진국같은 높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임을 절감합니다.

어느덧 5년차로 접어든 미국 생활을 하면 할수록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살면서 내가 누렸던 것들을 비로소 감사하는 기회들이 더 많습니다. 당연하게 누렸던 한국에서의 일상이 얼마나 귀하고 좋았던가를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특히 계절을 따라 맛있게 먹었던 풍성한 음식들과 우리나라의 선조들의 역사가 묻어있는 유적지, 그리고 고유한 우리나라의 산과 바다를 보았던 것들이 이제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외국 생활을 하면 할수록 한국에서 보내었던 모든 소중한 시간들은 더 깊이 되새기게 되게 됩니다. 어쩌면 당시에는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나라에 대한 감사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나라에서 살 때에는 비교가 되지 않음으로 제 나라에 대하여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서 흩어져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흩어져 살면서 조국 이스라엘 대한 구속과 회복에 대한 갈망을 갖았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께 나라의 소중함에 대한 잃었버렸던 감사를 회개하였습니다. 어쩌면 지금 나도 하나님 앞에 나의 모자란 것들을 훈련받고 있는지 모릅니다.아마도 평생 한국에서 살았다면 지금 외국에서 조국에 대해서 느끼는 이 경험을 경험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외국에서 더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공감이 됩니다. 나에게 대한민국의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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