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종교개혁기념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95개 조항을 담은 반박문을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 예배당 정문에 못박아 게시했습니다. 그때에 교황 레오 10세는 “ 마틴 루터는 술취한 독일인이다. 술에서 깨면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것이다”라고 간단히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미친 짓으로 보였던 루터의 행동은 결국 철옹성같은 카톨릭의 오래된 부패와 거짓된 신앙을 넘어서 교회 개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힘이었는가? 종교 개혁의 가장 힘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루터가 당시에 죽음의 위협을 받는 위험 가운데 결코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지 않았던 힘은 바로 성경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카톨릭의 주교가 루터에게 자신의 생각을 철회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때에 루터는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소.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을뿐 아니라 결단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오. 오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제 내년이면 종교개혁일은 50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제창한 그 날로부터 500주년이 된 현재의 교회는 성경을 온전히 100%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에 대하여 공격과 거역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인정하지 않게 되면 교회의 권위는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가 필요한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 권위의 말씀으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성경은 1500년간의 기간 중에 약 40여명의 저자들이 기록하였습니다 .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짝이 맞고 내용이 맞습니다. 성경자체의 온전한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인 증거입니다. 역사 속의 교회는 정경으로 66권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인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려고 하는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단들이 헛된 계시의 교훈들을 성경으로 더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66권의 정경만이 하나님의 권위있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교회는 인정합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교회가 강조해야 할 것은 성경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보다는 인간의 필요를 앞세우고 세상의 상황을 앞세우는 이 시대 속에서 교회가 사는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의 신앙이 성경으로 항상 세워지고 개혁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민자들의 힘들고 불안정한 삶의 중심에 교회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기대만큼 나의 관점에서만 교회를 보면 실망과 상처도 클 수 있습니다. 교회는 나를 넘어 우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으로는 주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교회를 세워갈 때에 텍스트(Text) 성경의 하나님의 관점에서 컨텍스트(Context)의 교회를 잘 세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우선 교회에 대해서 언급한 교회는 마태복음에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고 이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자 교회에 대한 언급을 하십니다. 주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하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 이 반석은 카톨릭에서는 베드로라고 해석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즉 주님의 교회는 예수님을 신앙고백으로 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와 나의 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찬양하는 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백하는 영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머리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인 예배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성경에서 롤모델이 되는 교회는 사도행전에 소개되는 초대예루살렘교회이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이하에 소개되는 초대예루살렘 교회는 우리에게 공동체 교회의 좋은 롤 모델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온 성도들이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는 주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풍성한 교제와 나눔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성경 속의 좋은 롤 모델의 교회는 조직과 제도가 잘 발달된 교회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통치하심을 따라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성이 회복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먼저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섬김을 실천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교회의 과제는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째 좋은 롤모델의 교회는 성경의 안디옥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역사가 짧은 가운데서도 좋은 일꾼들이 잘 양육되었고 풍성한 영성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함으로 복음을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좋은 모델이 됩니다. 안디옥교회는 교육과 선교의 좋은 롤 모델이 됩니다.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였을까?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말씀을 잘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삼으라는 말씀을 명령하셨습니다. 교회는 선교하여 예수님의 제자삼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내가 위로받고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우선적인 과제는 주님의 제자되어 세상으로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주님의 선교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삼아 세상으로 보낸 것처럼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선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경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경의 좋은 롤 모델이 되었던 교회들처럼 이민사회 가운데 좋은 롤 모델이 되는 교회로 재활성화되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42년 퀸즈 시대를 뒤로하고 롱아일랜드 시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헌당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제 공식적인 그 서막의 출발이 하나님과 대내외에 알려지는 테이프를 끓게 되었습니다.이제 우리는 새환경에서 새교회당을 중심으로 새교회 역사를 세워가야 하는 때가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과거의 교회 역사를 교훈삼아 새교회당을 중심으로 새교회를 개척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새교회를 세우는 개척자로서 우리가 갖아야 할 몇가지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 기득권을 갖고 주장하려고 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세워온 수고와 공로는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물론 그 눈물과 땀과 수고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공로를 생각하면 또 우리는 나를 앞세우는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새교회당을 세워가는 것은 이제 새교회를 개척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같이 출발선에 모여서 출발하려는 마음을 갖아야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평등한 마음을 갖고 교회를 세워간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오랜 교회 역사의 경험자들로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 도움을 받아서 마음을 다스리면서 먼저 나를 비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 열정을 갖고 자원하는 자세를 갖아야 합니다.
교회 개척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기쁜 일임에 분명합니다. 개척을 한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다른 개척교회들보다 여건이 좋은 형편입니다. 자체 땅과 건물을 갖고 나름대로 맺어진 관계의 성도들이 이미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미 갖고 있는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은 안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정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품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곳에 건물과 땅을 허락하심을 마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소원을 품고 열정 속에서 자원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거룩한 사명을 갖아야 합니다. 무어보다도 어떤 형편 속에서도 참고 희생하는 자원함의 열심을 갖고 함께 교회를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셋째 열린 마음을 갖고 전도하고 새가족들을 환대해야 합니다.
새환경에서 새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을 갖고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물론 전도는 어렵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지 않으면 새교회 공동체의 변화는 어렵습니다. 새사람을 개척하는 일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입니다. 그러나 모든 지금의 교회들이 전도로 시작했습니다. 전도할 때에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과거에 우리 교회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에 오는 새가족들을 조건없이 환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은혜받은 대로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교회 역사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개척자의 자세를 갖고 새지역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다함께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한국 티부이 프로그램 중에 문제있는 부부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지만 함께 살면서 상처로 인해서 부부지간이 남보다 못하고 심지어 원수 관계의 힘든 부부의 가정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행스럽게 티이부이에 출연한 부부들은 문제를 직면하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회복의 기회를 갖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경우에 가정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상한 가정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우리의 가정이 문제로부터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몇가지 과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첫째, 부정적인 기억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대개 문제있는 남편과 아내의 우선적인 문제는 상한 내면의 기억입니다. 특히 과거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과 부정적인 영향의 기억들은 오늘 현재의 남편과 아내에게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과거의 고통스러운 부모와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게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조건적인 용서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치유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주님께 우리의 고통의 기억 상하고 힘든 과거의 기억까지도 맡기고 기도하면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둘째, 가정의 회복은 진실하고 성숙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개 부부관계의 우선적인 문제는 단절된 대화의 문제입니다. 대화가 없으면 서로 오해하게 되어 관계는 더 멀어지게 됩니다. 상당한 경우에 문제 있는 부부들을 보면 대화가 없고 대화를 해도 아주 초보적인 대화에서 그칩니다. 문제있는 부부들의 경우에 우선 서로가 대화가 안통한다고 생각하고 마음 문을 닫아버립니다. 부부관계가 서로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속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의 문제있는 많은 부부들의 경우에 정서적인 미숙함으로 인해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부부 관계는 한몸의 관계 여야 하는 데 그것은 단지 육체뿐 아니라마음과 생각도 서로 하나임을 공유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사소한 음식에서부터 아이들의 양육,교회 생활, 인생의 진로 등에 대해서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대화할 때에 서로 하나됨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가정의 회복은 두 사람 서로가 많은 배려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문제있는 부부들의 공통점을 보면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나는 옳고 문제는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있는 부부들이 회복이 되는 과정을 보면 객관적인 상담가들 앞에 자신들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함께 고치는 노력을 하면서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인정하고 고치기를 소원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고통과 어려움의 댓가는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회복을 위한 고통의 치료의 댓가를 지불할 때에 행복을 회복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달 전부터 주중의 이틀 저녁 4시간을 이용하여 미국의 문화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는 시간을 꾸준히 갖고 있습니다. 대개 그 시간에 오는 사람들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일부러 배움의 우선순위를 결단하고 오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대개가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남미, 중국, 다양한 아시안 계통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가정을 갖고 있고 직업을 갖고 있지만 미국생활의 부족한 경험과 지식을 위해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입니다. 그 배움의 자리에 오기 위해서는 저녁 식사를 뒤로 미루기도 해야 하고 집에서 편안하게 쉬는 유혹도 극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배움의 가치를 알기에 배움을 위하여 기꺼이 결단하고 투자합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경험하는 것이 몸과 마음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경험입니다. 지금까지 알고 익숙했던 것대로 하려고만 하는 고정관념들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움의 과정을 자꾸 갖게 되면 마음이 유연해지고 그 결과 모든 것들을 대할 때에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은 변화에 능동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즐기게 됩니다. 그러나 배움을 멈추게 되면 기존의 자기 경험이 고집이 되어지면서 자신이 틀린 경우에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고치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변화에 대해서 거부하고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각감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우는 자리에 자기를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린아이같은 낮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늦은 나이에 미국에 와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에서 내가 우선 경험한 것은 나이를 내려놓고 낮은 마음에 거하지 않으면 못 배운다는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배우는 것은 내가 노력을 서너배 해도 나타나는 결과는 너무나 미미합니다. 그래서 더 자신에 대해서 채찍질해야 하고 더 연습하고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노력과 수고에 비해 그 결과가 느리고 미미한 상황에서도 배움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지키면서 자기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함을 갖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조금이라도 배우는 자리에서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마음, 자기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마음이 있으면 배움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움을 통해서 오는 가장 큰 효과는 자기 점검이 이루어지는 경험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보통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대개가 자동적으로 리더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어른이 되고 핵심적인 책임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객관성의 배움의 경험이 없이 홀로 주관성의 경험만으로 나이가 들게 되면 소통이 어렵고 공감이 안될 수 있습니다. 남의 말을 들어도 내 방식대로 듣고 또 내가 말을 할 때에도 내 방식대로 말을 합니다. 특히 미국 교육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내가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생각과 객관성의 증거들이 중요함을 보게 됩니다. 이런 배움의 자리를 통해서 점점 자신을 들여다보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더 채우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금의 시간이 바로 그 기회의 시간입니다. 헛되게 흘려보내고 후회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배움과 연단을 통해서 더 온전한 주님의 리더의 모습으로 배움을 실천하면서 자기를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은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었던 당시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미 생전의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서너번 이상 부활을 말씀하였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직접 나타났지만 처음에는 오히려 의심하였습니다. 이런 불신과 의심의 정황을 예수님은 알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최소한 14번 이상 부활의 몸으로 사람들에게 몸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예수님을 확신하고 난 이후에 죽음의 두려움을 너머 부활의 기적을 소망하면서 새로운 믿음 생활의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는가?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이 쓴 ‘특종 믿음 사건’이라는 책에서 그는 예수님의 기적의 부활에 대해서 4가지의 증거를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이후에 역사적으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해 무덤에 분명하게 장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십자가 처형 이후에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각기 다양한 처지와 상황에서 각양의 개인과 집단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넷째,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전까지 믿지 않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을 갑자기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이 많은 성도들의 삶과 믿음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확실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신성에 반대하는 모든 세상의 종교들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모든 종교들은 예수님에게 저항할 어떤 힘도 설득력도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지 사람을 착하게 되라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약속했고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주이신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고 결국 천국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생명의 길인 것을 확인하게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런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 몸의 부활을 의심하면서 질문하는 이들은 향해서 그는 자연을 통해서 분명하게 증거를 갖고 부활을 가르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고 사람의 육체가 있고 짐승의 육체가 있고 새의 육체가 있고 물고기의 육체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가 있고 땅에 속한 형체가 있고 하늘에 속한 영광이 있고 땅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몸도 땅의 육체가 있듯이 부활하여 하늘에 속한 형체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홀연히 성경의 약속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21세기의 우리는 과학과 합리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런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이미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이루신 모든 부활의 사건은 이성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명백한 증거를 바탕으로 믿어야 할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부활의 증거는 객관적인 증거를 갖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미 부활에 대한 진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연 속에 부활의 증거들을 갖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21세기의 내가 역사적인 증거와 성경의 선포와 자연의 명백한 증거를 통해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확신하면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간 인생의 중요한 진로의 고민 앞에서 갈등하는 두 사람의 삶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한 사람은 갈등하는 진로의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때에 대한 기다림을 믿고 현재의 자신을 좀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현재 자신의 꿈과 도전에 대해서 좀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기회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다른 한 사람은 갈등하는 가운데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명확한 인도하심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기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도전의 삶을 선택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포기하기 어렵고 저것도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것을 하면서 원하는 길을 향해 도전하여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아브라함에게 선택을 요구하실 때에 우선 요구하는 것은 “포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전부처럼 여겼던 가족과 고향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가치로 여겼던 가족중심, 평안과 안정 중심의 삶에 대해서 먼저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제자됨의 길을 선택하는 자들에게 먼저 요구하는 것이 “포기”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자 자매나 어머니와 아버지 자식을 떠날 것을 요청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도 혁명적인 가르침입니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설의 진리를 강조하십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먼저 역설의 진리를 실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정들었던 가족 고향과 부모를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떠났고 바울은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떠남으로 인생의 소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떠남의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인간적으로는 매정해야 하고 세상적으로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으면 관계적으로는 외로울 수 있고 물질적으로는 손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복을 경험했습니다.
역설의 진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소명의 길을 위해서 먼저 “포기”를 강조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하심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에게 내가 의지하고자 했던 모든 세상의 것들로부터 단절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연결되었던 모든 세상의 것들을 떠나라는 것은 사형선고와 같다고 여깁니다.그래서 상당한 경우에는 급진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융통성 있게 적당하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처신을 지혜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묘하게 세상의 합리성과 실용성에 이용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 안에서 나의 인생의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여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설의 원리는 먼저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내려놓고 포기한 경험이 없이 주님이 주시는 것들을 절대적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것을 얻으려면 이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역설의 진리는 여전히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지난 주간 치과에 가서 스켈링을 했습니다. 2년 전에 잇몸이 아파서 다녀온 이후에 모처럼 간 것입니다. 날마다 2-3번의 칫솔질을 열심히 하면서 나름대로 건강한 이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역시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충치도 생겼고, 치석도 생겼고, 잇몸도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나의 잘못된 습관이 문제였습니다. 날마다 1번 이상 치실을 사용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또한 칫솔질을 하면서 이의 구석 구석을 깨끗하게 닦지 않은 것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6년 전에 한국을 떠나면서 우리 집 식구 5명은 치과에서 이를 점검하면서 큰 댓가를 지불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도 여러명의 식구대로 너무도 아까운 큰 돈을 치과에 투자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문제는 습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나쁜 습관으로 결국 치아에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치아만 아니라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의 건강은 우리의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막상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어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기 까지는 문제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우리의 바람은 간절하지만 바른 습관으로 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복되는 나쁜 습관은 몸에 치명적인 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번 건강을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고통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목사님은 요즘 몸에 암이 발생하여 고통스러운 치료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치료가 궁금해서 연락을 드렸더니 그분의 말씀은 “목사님 나는 내몸이 이렇게 약한 줄 몰랐습니다. 그냥 한방에 훅 하고 가고 마네요”라고 하였습니다. 평소에 너무도 건강하던 몸인데 암치료를 받으면서 너무나도 무력한 육체의 모습을 경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몸을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살짝 땅에 떨어져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우리의 몸은 평소의 나쁜 습관 하나도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 예외없이 깨어져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질그릇같은 우리의 육체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건강한 습관을 날마다 갖아야 합니다. 내 몸의 건강은 내가 뿌린 대로 거둡니다. 나쁜 습관을 뿌리면 질병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습관을 뿌리면 건강으르 얻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미 나쁜 습관들은 버리고 좋은 습관을 갖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습관이 좋은지 우리 스스로가 알고 지켜야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 스스로가 내 몸에 대해서는 의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연약한 육체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입니다. 영혼도 거룩하게 세워져야 하지만 육체도 거룩하게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탈무드를 보면 저들의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정결의 습관들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가령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파문될 것이다”라고 엄하게 명령합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 그들은 씻기, 기름바르기, 규칙적인 운동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혼의 건강과 아울러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바른 습관과 규칙들을 지켜가면서 건강한 몸으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 목요일(2월 11일) 지난 2년 동안 기도하면서 고심하던 새로운 교회당 계약의 사인을 두 분의 안수집사님들과 함께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마쳤습니다. 새교회당은 롱아일랜드의 사요셋에 위치하고 있는 성공회 교회당입니다. 이미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가서 보았던 곳인데 1960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넓은 주차장과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본당과 더불어 식당과 교육관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사요셋은 이미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플러싱에서 30분 이내의 시간상 거리의 지역입니다. 사요셋은 고속도로와 더불어 다양한 도로와 더불어 맨해튼을 연결하는 기차역이 위치해 있어서 접근성이 좋은 도시입니다.
새교회당 계약을 하고 나서 건물 클로징까지 시간은 대략 2개월-3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계산상으로는 5월까지는 사요셋 교회당 건물을 클로징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현재 우리 교회당도 클로징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적어도 6월 이내에는 새로운 교회당으로 무빙되어질 예상을 하고 모든 준비를 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새교회당으로 무빙을 전제하고 우리가 당장 준비해야 할 것은 새교회당 리노베이션 준비입니다. 그래서 안수집사님들과 집사님들이 다함께 사요셋 교회당을 함께 자세하게 관찰하고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 지를 준비해할 것입니다. 최소의 비용으로 아름답고 실용성있게 수리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최소한 서너명의 건축업자들을 불러서 리노베이션 견적을 뽑아서 비교하여 보면서 합당한 업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새교회당의 변화를 위해서 내부적으로 우리가 우선 결단하고 준비할 것은 교회 이름의 변경 여부입니다. 이미 안수집사회에서는 새 변화를 위해서 교회 이름의 변경을 추진하는 것으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제 안수집사회에서의 결정을 제직회와 그리고 사무총회에서 물어서 결정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이름의 변경을 추진하는 이유는 새환경을 통해서 새마음으로 도전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의 다짐인 것입니다.
새교회당의 변화 앞에서 우리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인도를 함께 잘 받아야 합니다. 내 개인적인 입장과 생각을 내려놓고 공동체의 입장과 생각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환경적 변화가 순적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모든 결정과 일에 빠지지 말고 함께 참여하여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한국의 목사이자 교수인 한 아버지가 어린 친딸의 시체를 집에 유기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 핫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하여 신약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인 신학대학원에서 헬라어 및 신약학을 강의했을 뿐 아니라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딸을 구타하여 죽게 되자 그 시체를 집에 두고 있으면서도 버젓이 목회를 하고 교수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의 심리분석을 한 결과 자신이 어렵게 쌓은 스펙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40대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목사로서 교수로서 그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 스펙을 쌓았을 것입니다. 그 스펙으로 원하는 대학의 교수의 자리에서 강의도 하게 되고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도 하는 목사로서 사회적으로 나름의 인생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스펙을 통해서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아마도 절치부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펙을 통해서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죄와 악도 철저하게 덮고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교수이면서 목사로서 자기 딸을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집에 두고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할 수 있었을까? 분명히 그는 그의 입술로 설교를 하면서 기도하였을 것이고 성경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속인 것이고 사람을 속인 것이고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엄청난 일을 위해서 스스로 자수하지도 않았고 속이고 또 속인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힘들게 얻은 스펙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철저하게 속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그 동안 한국교회 안에 곪아 썩은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당한 경우에 스펙을 우선 보고 담임목회자를 뽑고 교수를 세우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부분 스펙에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펙에 종이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망가지고 심지어는 이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야망을 위한 사명 없는 스펙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철저하게 성품으로 지켜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는 성품은 마침내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은 스펙이 아니라 성품이 우선이 되어양 합니다. 스펙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스펙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학력과 경력의 스펙은 자리를 얻게 하지만 성품은 하나님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적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위하여 스펙을 쌓는 노력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성품은 시간이 가고 목사와 교수의 직분이 있다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스펙을 쌓는 열정과 노력 이상으로 마음이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정직하고 거룩한 성품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과거에는 거짓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정직과 순결의 종이 되기를 날마다 힘써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부끄럼이 없는 정직하고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의 성품을 세워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임을 알고 힘써 그 모습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