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을 기준으로 한해 교회의 재정을 결산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올해 교회 재정 결산은 목표한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심으로 결산했습니다. 이렇게 결산이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인도하심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헌신을 기꺼이 감당하신 집사님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헌금의 우선 요소는 십일조입니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 무용론을 주장합니다.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은 법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전부가 아버지의 것임을 인정하기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전의 성경의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했습니다(창14:20). 야곱은 벧엘에서 십일조를 맹세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시대에 십일조의 율법을 제정하셨을까요?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십일조를 행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형식보다는 바른 정신으로 십일조를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면서 날을 지키는 주일의 문제, 헌금을 드리는 문제와 같은 것들을 극단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소위 보수를 주장하는 교회에서는 너무 엄격하게 법적인 차원으로 강조하려고 하고 자유주의 계통에서는 너무 자유스럽게 몰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차원, 자유스러운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 ‘관계’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행위요 반응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가는 것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몸도, 시간도, 물질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권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법과 나의 자유를 넘어서서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를 담은 관계의 고백인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풍성하게 하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헌금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합니다. 고후8: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결국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균증하게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있는 자들의 있는 것들로 인해서 없는 자들이 있는 자들의 드리는 것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수단이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기심이 앞서거나 다른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서 인색함이 우선 되어지는 경우에는 결코 헌금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말로는 인정해도 믿음으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헌금은 바로 그 믿음의 고백이요 헌신인 것입니다. 그 헌금 가운데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정성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 1년동안 헌금의 고백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받고 살아온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그 풍성한 헌금의 양만큼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믿음, 풍성한 관계가 우리 속에 모두 경험되었던 한해였으면 좋겠습니다. 결산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 풍성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일하심을 찬양하며 송축합니다.

벌써 뉴욕에 산지 8년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년수만큼 감사도 점점 넘쳐감을 경험합니다. 물론 처음 뉴욕에 도착해서 살 때에는 뉴욕은 너무 이상하고 낯선 경계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시간이 더하면서 정이 들고 여러 가지 감사를 더하게 하는 도시입니다.

뉴욕은 도시와 시골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맨하튼과 같은 도시에서는 세계적인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입니다. 그곳에서는 항상 미술, 음악등의 다양한 공연이 준비되어 있고 세계 각 나라의 다양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뉴욕의 고급스러운 시골인 롱아일랜드가 더 좋습니다. 워낙 롱아일랜드가 큰 섬이라 충분히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곳만으로도 감사할 것이 많은 섬인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가 위치한 사요셋 근방의 오이스타 베이의 한적한 바닷가의 공원, 유수한 고급 브랜드가 충분하게 준비된 루스벨트 쇼핑몰, 아름다운 비취의 멋을 한껏 경험할 수 있는 포트 워싱톤과 같은 곳은 결코 롱아일랜드가 단조롭고 지루하지 않는 섬임을 증명합니다.

뉴욕은 잘 조성된 공원을 바로 집 근처에서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전에 우리 교회가 있었던 플러싱의 키세나 파크는 교회를 떠나고 나서 종종 찾곤 합니다. 특히 가을이 되면 공원의 단풍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여유로운 호수의 모습도 정겹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표를 갖고 한가롭고 여유있게 공원을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됩니다. 사택이 위치한 근반의 알리폰드 공원은 정상에 가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풍성한 운동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가족들과 함께 운동도 하고 바비큐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목적을 다 소화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운동인 테니스의 경우에 국적을 초월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하게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공원도 뉴욕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뉴욕은 이민자들의 필요를 잘 채워주는 최적의 도시입니다. 항상 미국의 타주를 다녀오면서 경험하는 것은 뉴욕의 식당의 음식맛은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장이나 학교나 다양한 선택을 하기에 최고의 도시인 것은 분명합니다. 점점 뉴욕의 경험에 익숙하면서 모든 것이 편리하게 경험되는 것은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뉴요커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반복되는 뉴욕에서의 삶을 살면서 너무 익숙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은 그래도 뉴욕에 살게 되면 이민자로서 더 수월하게 미국에 정착하는 기회가 된 것같습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에는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를 한번 다녀오면서 감사의 추억을 쌓고 싶습니다.

요즘 너무 자주 듣는 개혁이란 말에 대해서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너무나도 여기 저기서 개혁이란 말은 너무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 됨을 간과하고 너무 다른 사람과 제도에 대해서만 개혁을 부르짖는 경우가 많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요지 가운데 우선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나와 나의 믿음도 해당이 됩니다.

1517년 종교개혁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엇던 종교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얻어지는 ‘칭의’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그의 믿음은 개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값없이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됩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을 믿음으로 얻기까지 수많은 시간들을 스스로 노력과 고난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의해서 얻어지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고민하던 문제가 결국 복음을 통해서 푸리면서 그의 삶은 혁명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의 삶에 복음에 대한 철저한 직면과 깨달음은 나의 삶을 개혁되게 할 것입니다.

루터가 스스로 개혁을 경험하고 나서 당시의 교회의 개혁을 생각했던 것은 거룩한 분노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카톨릭의 보편화된 면죄부 판매를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시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당시 면죄부 판매가 너무나도 횡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면죄부 판매를 위해서 주교들은 대대적인 설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설교의 내용은 면죄부를 사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죽은 친구와 아버지와 친척들이 부르짖고 있는 애절한 소리를 듣지 못합니까? 여러분의 눈을 뜨고 여러분의 귀를 여시오…여러분은 동전이 헌금 궤 속에 들어가는 소리가 나자마자 사랑하는 영혼들은 연옥으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면죄부를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개혁자로서 삶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민감한 양심과 믿음으로 죄에 대한 거룩한 불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실천으로 나아기까지는 용기와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5개조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게시할 때에 그는 독일어가 아닌 라틴어로 명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선동이 목적이 아니라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루터의 이런 실천적인 행사는 불의와 거짓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바른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아야 할 개혁의 삶의 모습입니다. 불의와 거짓에 대해서 저항하는 바른 신앙의 용기와 결단이 개혁자다운 신앙의 모습일 것입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 소설은 우리의 현실과 꿈을 잘 묘사합니다. 소설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갈매기들의 삶의 현실에서 항상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왜 더 높이 날지 못할까? 왜 항상 반복되는 일상에 매여있는 것일까? 그는 너무 현실에 매여서 삶을 사는 자신과 동료 갈매기들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답답한 현실에서 더 높은 하늘을 꿈꾸면서 삽니다. 때로 그는 더 높은 하늘을 날기 위해서 무리한 모험을 시도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꿈을 향한 도전의 댓가는 많은 고통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의 꿈의 도전 결과 주변의 동료자들에게 현실의 삶에 맞지 않는다고 많은 비난과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매기 조나단은 힘든 현실 속에서 마음의 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남들보다 더 높게 그리고 더 멀리 날 수 있을 거야”라고 현실에서 항상 꿈을 꾸면서 살아갑니다. 꿈을 갖은 갈매기 조나단은 갈매기 현실 사회에서는 이상한 갈매기로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하늘을 향한 비상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그는 마침내 더 높이 오르고 더 멀리 날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본다”는 평범한 진리를 마침내 경험하게 됩니다. 갈매기 조나단의 하늘은 단히 먹이를 구하는 하늘이 아닌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더 보고 더 많은 자유와 성취를 경험한 꿈의 장소였습니다.

이민자들의 삶은 꿈과 거리가 먼 현실이 더 눈앞에 있는 실정입니다. 현실을 버티는 것 자체가 대부분 쉽지 않습니다. 비싼 물가와 렌트비 그리고 한정된 수입이 지금 냉정한 현실입니다.그 가운데 꿈을 잃어버리고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꿈을 잃은 현실은 기쁨도 없고 삶의 의욕과 생기도 없습니다. 침체된 현실의 삶을 살려면 꿈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가기를 꿈꿀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갈매기 조나단처럼 꿈이 있으면 도전하고 모험하고 열정을 갖게 됩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갈매기 조나단의 원형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최선의 삶을 사셨지만 이땅에 매이지 않는 더 높고 큰 꿈을 도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 속에서 도전하심으로 높고 큰 꿈을 성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악한 세상의 현실에서 구원과 자유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꿈이었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되는 자유와 기쁨와 평안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눌린자와 약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김과 높임을 받고 모두가 차별이 없는 정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은혜가 중심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 꿈을 도전하시고 마침내 섬김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현실 속에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현실 속에서 꿈을 향한 열정과 도전하는 자들을 도와주십니다. 현실을 무시하는 몽상가는 문제가 있지만 현실을 인지하고 최선을 다해 살면서 꿈을 향해 도전하는 자들을 예수님은 좋아하시고 도와주십니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열정을 잃지 말되 꿈을 향해 도전하는 열정도 잃지 않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에 파송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거룩한 모임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감당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 공예배입니다. 공예배를 함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공적으로 만나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공예배는 찬양, 설교, 성례, 기도, 헌금등으로 구성이 됩니다. 그 중에서 대표 기도는 너무 중요합니다. 과연 예배의 중요한 요소인 대표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공예배시에 대표 기도자는 대표 기도 시간이 설교나 가르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은혜에 치우쳐 기도하면 안됩니다.자신의 묵상과 깨달음들을 회중에서 전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특정인을 위한 간구의 시간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모든 회중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길게 장황한 기도는 은혜가 떨어집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단어와 내용을 간결하고 정리된 단어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화려하고 유식한 단어로 자신을 과시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대표기도자는 준비되어야 합니다. 대표 기도문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 전에 자리에서 준비하여야 하고 복장도 준비해야 합니다. 즉흥적인 기도는 위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횡설수설할 수 있기도 하고 길게 분량이 늘어날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문을 기도하며 준비하여 작성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하되 공예배 기도는 3분을 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공예배 대표 기도자는 공예배를 대표하는 자로서 강대상에 나갈 수 있는 교회 본당 앞자리에 준비하고 있다가 강대상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고 가는 동작 하나가 공예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대표기도를 드릴 때에 어법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성부 하나님입니다. 성자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성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호칭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물론 여기에 은혜, 사랑, 감사, 긍휼등이 수식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주님”“ 예수님” “성령님”하고 부르는 것은 성부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볼 때에 어법상 옳지 않습니다. 또 성부 하나님을 향해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법상 존칭이지만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서 바람직한 표현은 아닙니다.

대표기도자의 기도문의 내용에 포함되어야 할 핵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특히 한주간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대표기도자로서 우리 모임 속에 갖고 있는 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회개를 구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네째, 교회의 필요와 비젼들과, 목회자, 사역자, 선교사,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가장 당면한 교회의 중요한 사역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당일 예배의 설교자를 돕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표기도자는 어떤 형식보다도 성령님의 민감하신 인도를 받아서 드리는 영적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더 영적으로 깨어있는 기도자들이 세워지고 드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새벽 기도회 후 집사님들과 함께 커피 교제를 하면서 나온 주제가 ‘자기 자신을 아는 길’입니다.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직면하여 바로 아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를 알기 위해서 자신을 스스로 관찰하고 분석하여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열심히 관찰하면 나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가 거울을 보면 나의 모습이 비쳐지게 됩니다. 그럴때에 나의 외모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보이고 주름이 보이고 피곤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도 스스로 분석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거울은 성경입니다. 성경에 나의 마음을 비추어 볼 때에 내가 보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거울이 되면 우리의 깊은 내면의 문제, 감추었던 삶의 문제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를 아는 사람은 비로서 성장 기회가 온 것입니다. 보통 누군가 나에게 좋은 가르침을 해주어도 우리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있고 고귀한 교훈도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깨달음을 통해서 최고의 배움을 얻게 됩니다. 중요한 관건은 내가 깨달음의 자리로 나아가기까지 많은 시간 필요하고 실패의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스스로 깨달음을 빨리 얻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선택은 주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서 나의 생각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나를 비추어 나를 볼 때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무지함에 대한 깨달음, 죄악에 대한 깨달음,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의 깨달음들이 마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어리석과 미련한 마음을 내려놓고 회개하게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마음과 새의지를 주십니다. 그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과 의지대로 순종할 때에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자유와 함께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내안에 빛의 생명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주어야 합니다. 견고했던 얼음이 하늘의 뜨거운 태양으로 금방 녹듯이 우리의 마음도 주님의 전적인 빛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점점 나를 아는 은혜가 있을 때에 내 삶은 풍성하고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간 교단 수양회를 마치고 청교도 유적지가 있는 플리머스(Plymouth)를 탐방하였습니다. 미국에 온지 7년이 되면서도 항상 방문을 소원했지만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하던 차에 이번에 마침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신앙의 박해를 피해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고난의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플리머스였습니다. 플리머스에 처음 도착한 청교도들의 첫흔적을 기념하는 작은 바위가 역사적인 유적으로 잘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까깝게도 그들이 타고 온 메이플라워는 새롭게 제작되는 바람에 현장에 전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620년 12월 21일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그해 겨울 무려 44명이 추위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도착 다음해에 인디언들과 화친을 맺고 옥수수 농사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마을 이루면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지를 소개하는 곳이 바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antation)입니다. 우리는 아침 9시 개장에 맞추어 가장 먼저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크게 5개의 섹션으로 되어 있었는데 3곳은 청교도들의 17세기의 삶의 모습, 2곳은 당시 미국인디언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가 들린 곳은 17세기 미국 인디언들의 부락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집과 주방 그리고 당시의 배와 물고기를 잡던 모습, 사냥하던 모습을 재현하여 놓았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실제의 인디언들의 복장과 생활기구들을 보면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고 환경에 걸맞는 적절한 지혜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디언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농사방법이 청교도들의 정착과 생활에 큰 도움이 된 것이 분명합니다.
다음에는 17세기 미국에 처음으로 정착한 청교도들의 생활을 재현한 마을을 보게 되었습니다. 침대와 더불어 불을 떼어서 음식을 만들고 화덕을 만들어서 빵을 굽던 모습 그리고 짐슴을 키우고 밭을 일구어서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집안에서 생활하는 가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온 것은 신앙 때문이었고 더 궁극적으로는 카톨릭과 영국 성공회의 부패하고 타락한 신앙과는 분리되는 순결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바르고 순결한 신앙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모진 핍박과 고난을 겪었지만 신앙으로 말미암는 놀라운 땅의 열매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막연하고 멀리만 보였던 이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인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도 도전하여 열매를 맺은 청교도들을 다시 한번 본받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첫째 날
7월24일부터 28일까지 4박 5일간 일정으로 우리 교회 자체 단기 선교팀이 헤이티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헤이티 현지의 선교팀은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2년에 한번씩 함께 협력을 한 팀입니다. 24일 아침 7시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는 JFK 공항을 2시간 넘겨 9시 경에 출발해서 약 4시간여 비행 끝에 헤이티에 도착했습니다. 현지 선교사님의 영접을 받아 우리가 머무는 선교하우스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첫날 오후 시간은 오리엔테이션 시간과 짐정리 시간을 갖고 저녁에 함께 예배시간을 갖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둘째 날
새벽 6시에 새벽기도회와 더불어 7시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에 게스트 하우스를 떠나서 첫날 사역지에 도착했습니다. 세계에서 2번째로 못사는 지역이었습니다. 먼저 마을을 다니면서 축호전도를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준비해간 생활용품 선물과 옷과 신발을 가정에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VBS 사역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후에는 밥을 나누어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약 200여명 이상의 아이들에게 밥과 닭고기로 된 반찬과 음료수를 배급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선교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서 저녁을 함께 나누고 8시부터 예배의 시간을 함께 드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첫날 사역을 통해서 가장 빈곤한 지역에 복음과 밥을 나누어주면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가장 보람된 시간을 갖았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사역을 위하여 약 1시간 30분 가량 이동하는 시골로 갔습니다. 그 지역은 우리가 협력하는 현지 선교팀들이 학교를 지어서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현지에 도착해서 먼저 VBS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역시 첫날처럼 밥과 닭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축호전도를 하고 생활용품과 옷 그리고 신발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첫날보다는 좀 더 환경이 나았지만 여전히 헤이티 현지의 생활은 너무도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은 감사와 더불어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현지의 선교사님과 선교팀들이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현지의 학교사역을 중심으로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였습니다.
넷째 날
다시 둘째 날 사역 한 장소로 다시 조인되어 페인팅 사역과 밥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 현지의 선교사역센터의 벽과 의자들을 페인팅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밥을 나누어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밥을 나누어주는 시간을 공지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2시간 전부터 아이들이 그릇을 들고와서 뙤약볕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심지어 어린 3이 채 안된 어린 아이들로부터 시작하여 어린아이들이 죽기 살기로 한끼의 식사를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수고의 댓가를 지불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공식적인 모든 이번 선교의 사역들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선교를 통해서 헤이티의 현지 선교사님과 우리 팀이 서로 협력하여 선교 사역들이 더 확장되고 더 보람있게 열매를 맺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선교의 열정을 갖고 선교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속 주님오실 때까지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함께 협력하여 주신 모든 교회의 모든 선교동역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교회 오피스에서 항상 쓰던 프린터기가 한달 동안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리 저리 둘러보아도 도대체 작동이 안되는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우연히 다시 체크를 하다가 전원이 연결된 선이 기기에 꽂혀는 있었지만 살짝 빠져 있는 정황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시 정확하게 꽂고 작동 시험을 하였더니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었습니다. 세심한 점검을 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인생의 순적한 작동을 위해서 우리에게 상당한 경우에는 세심하고 민감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실제의 삶에 사소한 것들의 점검이 안되어 큰 문제를 그르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항상 운전을 하면서 경험하지만 차 점검이 너무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기름이 제대로 채워져 있는지, 타이어의 바람이 괜찮은지, 엔진 오일이 적당한지, 냉각수가 적당하게 있는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점검을 위해서는 세심한 관찰의 수고와 더불어 구체적인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적당하게 무시하고 넘어가다가 결국 더 문제를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내 인생의 어떤 부분의 문제들도 사전에 충분하게 점검이 되어 고치고 수정했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고장난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점검하지 않고 그냥 잘못된 대로 반복하였을 때에 나는 불량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것들의 점검을 통해서 바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빨리 바르게 대처하는 점검을 통해서 새롭게 도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세심한 점검이 필요한 곳은 인간관계입니다. 사랑하는 부부이지만 서로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내면을 자꾸 싸매어주고 알아주면서 관계해야 합니다. 상당한 경우에 이미 익숙한 관계로 인해서 형식적인 관계로 지내게 되면 결국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특히 필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의 나눔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힘든 부분, 어려운 부분들을 같이 대화해야 합니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장래의 삶의 문제들을 진솔하게 대화하고 같이 점검하면서 한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만일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민감한 점검을 통해서 고치고 바르게 해할 것입니다.

함께 교회를 세워갈 때에 우리는 함께 세심하게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사역을 하는 팀원들 서로 대화하면서 같이 점검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인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세심한 점검을 통해서 내 기준의 교회가 아닌 모두의 공동체의 교회로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지속되는 관계 속에서 민감하고 세심한 영성의 교회로 세워가려면 우리 속에 민감하고 세심한 영성으로 세워져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전에 우리나라에서 건강 강의로 유명하였던 한강사는 암은 생각의 습관에서 온다고 강조했습니다. 암에 걸리는 사람은 암을 부르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암을 부르는 생각은 대개가 암이 좋아하는 부정적인 생각의 습관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찬성합니다. 목회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험하는 것은 생각의 습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자동차의 기어와 같습니다. 차는 1단 기어를 넣으면 1단 전진합니다. 그러나 후진 기어를 넣으면 차는 후진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우리 인생도 생각에 따라 전진할 수도 있고 후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의 습관은 이미 굳고 견고하여서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더 변화가 어렵습니다. 특히 변화가 어려운 사람은 자기 고집이 견고한 사람입니다. 내가 이미 옳다라고 스스로에게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상적인 지식이 많은 사람, 나름 대로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하신 이유는 변화를 거부하는 교만한 사람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생각이 바꾸기 위해서는 스스로 높은 마음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변화되어서 해야 할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닮으면 우리의 인생은 행복하게 됩니다. 어떻게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생각을 닮을 수 있을까? 100%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을 모방하면서 변화되어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깊고 넓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하고 지혜롭습니다. 그런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지각에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깨달음은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의 무지로부터 새로운 마음의 앎을 경험하게 합니다. 내안에 지각을 밝혀서 오는 성령님의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생각들로 마음이 채워질 때에 우리는 마치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는 것같이 소망이 생깁니다. 그 생각으로 선택하고 나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생각인가? 나의 생각인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분간하는 방법은 테스트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먼저 실험적으로 적용하여 볼 때에 분명하게 어떤 형태로든지 징조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각의 특징은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 대신에 평안과 기쁨과 감사함이 일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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