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교회 제자훈련이 지난 주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양육반과 사역반 과정으로 진행이 됩니다. 양육반 과정은 신앙의 베이직을 확인하는 과정의 훈련이고 사역반은 교회의 리더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이해와 관점을 함께 훈련 받게 됩니다. 사실 바쁘고 힘든 이민 생활에서 주중에 별도의 서너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부담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또 여러가지 과제를 해야 하는 부담이 요구됩니다. 많은 댓가의 부담을 안고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자훈련은 필수입니다.

왜 부담스럽게 제자훈련을 해야 합니까? 이것은 말 그대로 주님의 제자됨을 위해서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닮아가기 위해 우리의 지,정,의를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훈련은 반복을 통해서 나의 행동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과제입니다. 매주 훈련 과정을 통해서 성경 요절을 암송해야 하고 날마다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더불어 독서를 통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관점을 훈련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갖으면서 자신을 쳐서 복종함으로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행동과 삶을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종종 교회 가운데 너무나도 야생마같은 사람들은 많이 만나게 됩니다. 본인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인격은 믿음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생활은 오래 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전히 신앙생활을 자기 성격대로 하고 자기의 과거의 습관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자신을 쳐서 철저히 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제대로 주님 앞에 잘 훈련받은 사람들은 조련마처럼 쓰임받게 됩니다. 남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교회는 훈련된 사람들을 리더로 세워야 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다 구렁텅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 결과 교회를 세우기보다 자기를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훈련안된 일꾼이 교회에 세워는 가장 큰 잘못은 결국 교회가 하나님 중심이기보다 사람 중심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기초는 시간이 걸려도 각 사람을 먼저 주님의 제자로 온전하게 세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3년동안 12명을 집중적으로 양육하고 훈련하는데 투자하였습니다. 바울은 선교하고 교회를 세웠지만 그의 사역의 중심에는 좋은 일꾼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와지기 위해서는 주님을 닮은 좋은 일꾼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자기의 죄성과 고집과 성격을 누르고 주님의 제자로 세워기지를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제자훈련에 임하는 모든 사람들이 훈련을 통해서 더욱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소수의 사람들이 주도하는 역사입니다. 그 소수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다윗은 다수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골리앗에게 도전하여 마침내 승리하였습니다. 결국 한사람 믿음의 사람 다윗의 도전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믿음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12명의 정탐꾼 중에서 이스라엘의 도전을 주장한 2명의 소수였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도전을 선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가나안의 축복을 주었습니다. 믿음의 느헤미야는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대하는 가운데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52일만에 재건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도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소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문제를 바라 볼 때에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을 집중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살폈습니다. 대부분 도전을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바라보면서 결국 스스로 두려움에 빠져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믿음의 소수는 문제와 힘든 환경 너머의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믿음으로 도전하여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거룩한 믿음으로 도전하였던 소수의 사람들은 선행되어진 작은 승리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작은 도전의 승리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맹수들의 도전 앞에서 물맷돌을 던지면서 승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무섭고 사나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전하여 작은 승리를 경험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을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날마다 광야에서 작은 도전에 승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작은 삶의 승리가 내일의 큰 도전의 디딤돌이 됩니다. 결국 믿음으로 과거의 승리를 하고 지금을 사는 사람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거룩한 소수의 사람들은 다수의 반대와 비판을 직면해야 합니다.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와 진행되어진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반증합니다. 반대하는 다수는 자기의 경험과 이성을 앞세웁니다. 때로는 환경과 현실을 앞세워 비난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상황에서 거룩한 믿음의 소수의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비젼이 그 마음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여기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믿음의 소수는 준비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소수를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젊어서도 준비되면 쓰임받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준비된 자를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준비된 사람은 고난의 댓가를 철저히 지불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거룩한 사람들을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고 죄와 싸우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헌신의 댓가를 지불하는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의 역사로 만들어집니다. 새봄을 맞이하여 거룩한 믿음의 소수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거룩하게 쓰임받는 일꾼으로 승리하기를 소원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운동 중에서 테니스만한 운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테니스의 매력은 그 어떤 운동보다도 많은 운동량과 더불어 익사이팅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동안 테니스는 서구의 운동으로 대명사처럼 여겼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테니스의 변방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정현 선수가 호주 메이저테니스대회에서 4장에 오르면서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테니스는 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기본기가 중요한 운동입니다. 먼저 몸의 자세의 기본기도 중요하지만 라켓을 이용한 기본기의 자세도 잘 익혀야 합니다. 특히 라켓을 이용해서 강하고 빠른 스트로크와 서브를 하기 때문에 기본이 되는 자세를 잘 갖추지 못하면 오히려 몸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한가지 기술로는 어렵습니다. 서브도 좋아야 하고 오른쪽 왼쪽의 스트로크 그리고 스매싱, 발리들의 다양한 기술이 골고루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최소한 시합에서 서너시간을 빠르게 뛰면서 운동을 하려면 발이 빨라야 하고 다양한 스텝의 기본기를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메이저대회 4강에 오른 정현 선수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테니스의 기본 실력을 골고루 잘 갖춘 선수입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테니스가 어려운 것이 기본기를 갖추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기본기 잘 갖추어진 테니스 선수가 롱런하고 잘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기를 잘 갖추어야 오랜 신앙 생활에서 결국은 이기는 자가 됩니다.
테니스는 그 어떤 경기보다도 멘탈이 중요한 운동입니다. 코트 안에서 네트를 두고 상대방 선수와 시합을 할 때에 빠르고 강한 볼을 제대로 치고 원하는 코스에 보내면서 시합에 이기기 위해서는 매순간 마다 강한 멘탈이 요구됩니다. 특히 더 체력의 우위에 있는 선수, 빠른 서브와 그리고 랭킹이 우위에 있는 선수와 시합을 해서 이기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강한 자신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특히 시합을 하다보면 상대방의 비매너를 대할 때도 있고 마음을 흔드는 주변적인 요소들이 발생합니다. 그때에 감정을 잘 조절하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의 멘탈이 있을 때에 이기는 시합을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정현 선수는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인 죠쿄 비치와 같은 선수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강한 멘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한 멘탈은 저절로 키워지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생각의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설득하면서 강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궁극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결국은 이기는 자가 됩니다.
테니스는 실수를 줄이는 사람이 이기는 운동입니다. 화려한 기술도 중요하지만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선수인 페더로가 37살의 노장에도 불구하고 젊은 선수들과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노련함과 더불어 실수를 줄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젊은 선수들은 화려하고 빠른 기술을 이용하여 멋있는 경기를 벌이지만 실수가 많습니다. 그것은 곧 점수를 잃게 합니다. 실수를 줄이는 방법은 빨리 점수를 얻으려는 조급함을 줄이고 정확한 테니스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정현 선수가 메이저대회 4강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실수를 줄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려하지만 않지만 충분히 랠리를 하면서 상대방을 흔들면서 결국 실수를 유도한 결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결국은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넘어지지 않는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테니스의 원리와 신앙생활, 목회도 유사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의 승리, 목회의 승리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본기가 탄탄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한 마음의 다스림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실수를 줄이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바람은 빠른 시간 안에 우리나라 선수가 테니스 메이저대회 우승자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2018년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더욱 주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2018년 새해 우리 교회는 “견고하게 세워져가는 교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우리의 믿음을 너무 흔드는 현실입니다. 점점 우리가 몸담고 있는 미국은 성경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현실입니다. 성경이 정확무오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고 다수의 사람들의 상대주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교제하는 이민 사회는 점점 교회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고 영적인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가는 실정입니다. 이 정황에서 우리는 견고한 신앙으로 자기를 세우고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먼저 성경 말씀으로 자신을 견고하게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의 빛으로 내 발의 등으로 삼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지속적으로 내 마음에 말씀을 두는 시간을 갖아야 합니다. 특히 올 1년동안 성경을 1독하거나 매일 묵상을 하거나 일주일에 성경요절을 한절 이상 암송하거나 하는 자기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 속에서 성경 말씀을 양육하고 훈련하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믿음은 계속해서 채움 속에서 활동해서 자라고 변하고 새로워질 때에 더욱 견고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님의 성품으로 자신을 견고하게 세워가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과거의 나의 성품이 있습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성품을 더욱 마음에 소원하면서 변하여 더욱 견고하게 세워가기를 힘쓰는 한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원하는 주님의 성품의 회복을 위해서 성령님의 능력을 구하며 날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쳐서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변화를 통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능력을 더욱 경험할 것입니다.
셋째, 주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사명의 자리를 견고하게 지켜야 합니다.
사명의 자리를 견고하게 지킬 때에 주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집니다. 사명의 자리를 견고하게 지킬 때에 이땅의 주의 교회들이 견고하게 세워져 갑니다. 한사람 아간같은 견고하지 못한 한 사람 때문에 주의 교회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최전방에 있는 교역자와 교회의 평신도 핵심 사역자들은 대적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오직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승리해야 합니다.
한해의 영적 여정 가운데 우리는 수많은 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영적으로 견고하게 잘 준비되어 세워져 있으면 주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18년 한해의 여정 속에서 우리 모두가 견고한 교회로 잘 세워져가는 한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2017년을 돌아보며
박춘수 목사

잊게 하소서
한 해를 돌아보며
무심함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같이
마음의 추억에 후회가 조금도 남지 않게
모든 아픈 것들을 단호하게 잊게 하소서

덮게 하소서
한 해를 돌아보며
불쏘시개처럼 미움으로 타오르던
마음의 화덕이 조금도 타지 않게
모든 증오하는 것들을 미련없이 덮게 하소서

버리게 하소서
한 해를 돌아보며
큰 풍선같이 터질 것같은 크기로 부풀어오르던
하늘에 떠있던 날린 마음을 조이며
모든 욕심의 꿈들을 꼭 버리게 하소서

보게 하소서
한 해를 돌아보며
무지했던 어둠의 영혼의 미로에서
흔적없는 마음의 지경의 이정표를 새로 만들며
모든 새 삶의 갈 길을 다시 보게 하소서

견고하게 하소서
한 해를 돌아보며
너무나도 속절없던 연약한 마음으로
무너진 믿음의 마음의 제방을 다시 쌓으며
모든 인생의 말씀의 길을 견고하게 걷게 하소서

지난 주일을 기준으로 한해 교회의 재정을 결산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올해 교회 재정 결산은 목표한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심으로 결산했습니다. 이렇게 결산이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인도하심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헌신을 기꺼이 감당하신 집사님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헌금의 우선 요소는 십일조입니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 무용론을 주장합니다.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은 법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전부가 아버지의 것임을 인정하기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전의 성경의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했습니다(창14:20). 야곱은 벧엘에서 십일조를 맹세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시대에 십일조의 율법을 제정하셨을까요?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십일조를 행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형식보다는 바른 정신으로 십일조를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면서 날을 지키는 주일의 문제, 헌금을 드리는 문제와 같은 것들을 극단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소위 보수를 주장하는 교회에서는 너무 엄격하게 법적인 차원으로 강조하려고 하고 자유주의 계통에서는 너무 자유스럽게 몰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차원, 자유스러운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 ‘관계’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행위요 반응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가는 것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몸도, 시간도, 물질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권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법과 나의 자유를 넘어서서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를 담은 관계의 고백인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풍성하게 하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헌금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합니다. 고후8: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결국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균증하게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있는 자들의 있는 것들로 인해서 없는 자들이 있는 자들의 드리는 것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수단이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기심이 앞서거나 다른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서 인색함이 우선 되어지는 경우에는 결코 헌금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말로는 인정해도 믿음으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헌금은 바로 그 믿음의 고백이요 헌신인 것입니다. 그 헌금 가운데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정성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 1년동안 헌금의 고백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받고 살아온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그 풍성한 헌금의 양만큼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믿음, 풍성한 관계가 우리 속에 모두 경험되었던 한해였으면 좋겠습니다. 결산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 풍성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일하심을 찬양하며 송축합니다.

벌써 뉴욕에 산지 8년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년수만큼 감사도 점점 넘쳐감을 경험합니다. 물론 처음 뉴욕에 도착해서 살 때에는 뉴욕은 너무 이상하고 낯선 경계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시간이 더하면서 정이 들고 여러 가지 감사를 더하게 하는 도시입니다.

뉴욕은 도시와 시골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맨하튼과 같은 도시에서는 세계적인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입니다. 그곳에서는 항상 미술, 음악등의 다양한 공연이 준비되어 있고 세계 각 나라의 다양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뉴욕의 고급스러운 시골인 롱아일랜드가 더 좋습니다. 워낙 롱아일랜드가 큰 섬이라 충분히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곳만으로도 감사할 것이 많은 섬인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가 위치한 사요셋 근방의 오이스타 베이의 한적한 바닷가의 공원, 유수한 고급 브랜드가 충분하게 준비된 루스벨트 쇼핑몰, 아름다운 비취의 멋을 한껏 경험할 수 있는 포트 워싱톤과 같은 곳은 결코 롱아일랜드가 단조롭고 지루하지 않는 섬임을 증명합니다.

뉴욕은 잘 조성된 공원을 바로 집 근처에서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전에 우리 교회가 있었던 플러싱의 키세나 파크는 교회를 떠나고 나서 종종 찾곤 합니다. 특히 가을이 되면 공원의 단풍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여유로운 호수의 모습도 정겹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표를 갖고 한가롭고 여유있게 공원을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됩니다. 사택이 위치한 근반의 알리폰드 공원은 정상에 가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풍성한 운동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가족들과 함께 운동도 하고 바비큐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목적을 다 소화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운동인 테니스의 경우에 국적을 초월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하게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공원도 뉴욕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뉴욕은 이민자들의 필요를 잘 채워주는 최적의 도시입니다. 항상 미국의 타주를 다녀오면서 경험하는 것은 뉴욕의 식당의 음식맛은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장이나 학교나 다양한 선택을 하기에 최고의 도시인 것은 분명합니다. 점점 뉴욕의 경험에 익숙하면서 모든 것이 편리하게 경험되는 것은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뉴요커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반복되는 뉴욕에서의 삶을 살면서 너무 익숙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은 그래도 뉴욕에 살게 되면 이민자로서 더 수월하게 미국에 정착하는 기회가 된 것같습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에는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를 한번 다녀오면서 감사의 추억을 쌓고 싶습니다.

요즘 너무 자주 듣는 개혁이란 말에 대해서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너무나도 여기 저기서 개혁이란 말은 너무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 됨을 간과하고 너무 다른 사람과 제도에 대해서만 개혁을 부르짖는 경우가 많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요지 가운데 우선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나와 나의 믿음도 해당이 됩니다.

1517년 종교개혁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엇던 종교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얻어지는 ‘칭의’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그의 믿음은 개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값없이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됩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을 믿음으로 얻기까지 수많은 시간들을 스스로 노력과 고난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의해서 얻어지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고민하던 문제가 결국 복음을 통해서 푸리면서 그의 삶은 혁명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의 삶에 복음에 대한 철저한 직면과 깨달음은 나의 삶을 개혁되게 할 것입니다.

루터가 스스로 개혁을 경험하고 나서 당시의 교회의 개혁을 생각했던 것은 거룩한 분노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카톨릭의 보편화된 면죄부 판매를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시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당시 면죄부 판매가 너무나도 횡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면죄부 판매를 위해서 주교들은 대대적인 설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설교의 내용은 면죄부를 사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죽은 친구와 아버지와 친척들이 부르짖고 있는 애절한 소리를 듣지 못합니까? 여러분의 눈을 뜨고 여러분의 귀를 여시오…여러분은 동전이 헌금 궤 속에 들어가는 소리가 나자마자 사랑하는 영혼들은 연옥으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면죄부를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개혁자로서 삶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민감한 양심과 믿음으로 죄에 대한 거룩한 불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실천으로 나아기까지는 용기와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5개조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게시할 때에 그는 독일어가 아닌 라틴어로 명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선동이 목적이 아니라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루터의 이런 실천적인 행사는 불의와 거짓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바른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아야 할 개혁의 삶의 모습입니다. 불의와 거짓에 대해서 저항하는 바른 신앙의 용기와 결단이 개혁자다운 신앙의 모습일 것입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 소설은 우리의 현실과 꿈을 잘 묘사합니다. 소설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갈매기들의 삶의 현실에서 항상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왜 더 높이 날지 못할까? 왜 항상 반복되는 일상에 매여있는 것일까? 그는 너무 현실에 매여서 삶을 사는 자신과 동료 갈매기들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답답한 현실에서 더 높은 하늘을 꿈꾸면서 삽니다. 때로 그는 더 높은 하늘을 날기 위해서 무리한 모험을 시도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꿈을 향한 도전의 댓가는 많은 고통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의 꿈의 도전 결과 주변의 동료자들에게 현실의 삶에 맞지 않는다고 많은 비난과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매기 조나단은 힘든 현실 속에서 마음의 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남들보다 더 높게 그리고 더 멀리 날 수 있을 거야”라고 현실에서 항상 꿈을 꾸면서 살아갑니다. 꿈을 갖은 갈매기 조나단은 갈매기 현실 사회에서는 이상한 갈매기로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하늘을 향한 비상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그는 마침내 더 높이 오르고 더 멀리 날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본다”는 평범한 진리를 마침내 경험하게 됩니다. 갈매기 조나단의 하늘은 단히 먹이를 구하는 하늘이 아닌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더 보고 더 많은 자유와 성취를 경험한 꿈의 장소였습니다.

이민자들의 삶은 꿈과 거리가 먼 현실이 더 눈앞에 있는 실정입니다. 현실을 버티는 것 자체가 대부분 쉽지 않습니다. 비싼 물가와 렌트비 그리고 한정된 수입이 지금 냉정한 현실입니다.그 가운데 꿈을 잃어버리고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꿈을 잃은 현실은 기쁨도 없고 삶의 의욕과 생기도 없습니다. 침체된 현실의 삶을 살려면 꿈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가기를 꿈꿀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갈매기 조나단처럼 꿈이 있으면 도전하고 모험하고 열정을 갖게 됩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갈매기 조나단의 원형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최선의 삶을 사셨지만 이땅에 매이지 않는 더 높고 큰 꿈을 도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 속에서 도전하심으로 높고 큰 꿈을 성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악한 세상의 현실에서 구원과 자유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꿈이었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되는 자유와 기쁨와 평안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눌린자와 약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김과 높임을 받고 모두가 차별이 없는 정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은혜가 중심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 꿈을 도전하시고 마침내 섬김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현실 속에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현실 속에서 꿈을 향한 열정과 도전하는 자들을 도와주십니다. 현실을 무시하는 몽상가는 문제가 있지만 현실을 인지하고 최선을 다해 살면서 꿈을 향해 도전하는 자들을 예수님은 좋아하시고 도와주십니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열정을 잃지 말되 꿈을 향해 도전하는 열정도 잃지 않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에 파송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거룩한 모임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감당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 공예배입니다. 공예배를 함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공적으로 만나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공예배는 찬양, 설교, 성례, 기도, 헌금등으로 구성이 됩니다. 그 중에서 대표 기도는 너무 중요합니다. 과연 예배의 중요한 요소인 대표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공예배시에 대표 기도자는 대표 기도 시간이 설교나 가르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은혜에 치우쳐 기도하면 안됩니다.자신의 묵상과 깨달음들을 회중에서 전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특정인을 위한 간구의 시간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모든 회중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길게 장황한 기도는 은혜가 떨어집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단어와 내용을 간결하고 정리된 단어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화려하고 유식한 단어로 자신을 과시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대표기도자는 준비되어야 합니다. 대표 기도문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 전에 자리에서 준비하여야 하고 복장도 준비해야 합니다. 즉흥적인 기도는 위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횡설수설할 수 있기도 하고 길게 분량이 늘어날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문을 기도하며 준비하여 작성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하되 공예배 기도는 3분을 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공예배 대표 기도자는 공예배를 대표하는 자로서 강대상에 나갈 수 있는 교회 본당 앞자리에 준비하고 있다가 강대상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고 가는 동작 하나가 공예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대표기도를 드릴 때에 어법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성부 하나님입니다. 성자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성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호칭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물론 여기에 은혜, 사랑, 감사, 긍휼등이 수식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주님”“ 예수님” “성령님”하고 부르는 것은 성부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볼 때에 어법상 옳지 않습니다. 또 성부 하나님을 향해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법상 존칭이지만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서 바람직한 표현은 아닙니다.

대표기도자의 기도문의 내용에 포함되어야 할 핵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특히 한주간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대표기도자로서 우리 모임 속에 갖고 있는 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회개를 구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네째, 교회의 필요와 비젼들과, 목회자, 사역자, 선교사,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가장 당면한 교회의 중요한 사역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당일 예배의 설교자를 돕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표기도자는 어떤 형식보다도 성령님의 민감하신 인도를 받아서 드리는 영적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더 영적으로 깨어있는 기도자들이 세워지고 드려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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