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성경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계획이 잘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구약을 통하여 준비하셨고 신약을 통하여 완성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준비셨습니다. 마침내 언약의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구원주를 준비하시고 아울러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마침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곳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마귀가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곳에는 분쟁과 싸움과 미움이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기까지 세상을 허용하지만 마침내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심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완성하시고 아직 완전한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시간은 이미와 아직의 중간기입니다. 이 중간기를 하나님은 통치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사람들을 부르는 사명을 불신자에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삶을 기다리십니다. 지금 이 때를 향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과 심판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세상 가운데는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고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고 궁극적으로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코로나바이러스와 다양한 자연재해와 전쟁과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더 심각하게 지구촌 곳곳마다 심각한 재앙들로 인해서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건과 사고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먼저, 재앙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사인의 계획입니다.마치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시는 계획이 있듯이 모든 재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사인입니다. 둘째, 예수그리스도에게에게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재앙은 인간의 무력함을 알게 하고 구원주되시는 예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사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계획 앞에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임박한 구원을 더욱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세상의 구원주가 될 수 있음을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알리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우선적인 사명은 구원의 복음을 말과 삶과 섬김을 통하여 더욱 알리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위험한 수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은 뉴욕과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더 심각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염성은 아직도 위험한 수준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위험한 수준의 삶이 이제는 뉴노멀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뉴노멀, 즉 새로운 표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뉴 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불편한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의 일상들이 전부 멈추어서게 된 정황입니다. 학생들은 학교 교실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대면하여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일상적으로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규제를 받고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는 일도 이제는 위험한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일상의 삶이 중지되면서 일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꿈이 되어 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뉴 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일상적인 공동체 교회의 예배를 현장에서 자유롭게 드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예배라는 기형적인 새로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함께 교회당에서 모여 식사 교제를 하던 일도 어렵고 작은 공간에서 서로 모이는 모임이나 훈련을 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다양한 모임을 통해서 경험하였던 다양한 은혜의 기회들이 줄어들게 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더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뉴 노멀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신앙은 어떤 것일까?

우선, 복음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본기는 복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구원주로 믿고 삶의 주로 고백하고 경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은 오직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신앙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질 때에 우리의 삶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더욱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것은 복음 중심이 되기를 소원하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둘째,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뉴 노멀 시대는 위험한 상황을 앞세운 실용주의, 자기를 앞세운 이기주의,그리고 경제를 앞세운 맘모니즘이 우상이 될 위험이 더욱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삶과 생각과 행위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의 권위인 것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뉴 노멀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성경을 가까이하고 날마다 꾸준한 묵상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교회 공동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수많은 박해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교회와 함께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와주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 하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센터이기 때문입니다. 뉴 노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교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이렇게 단기간에 전세계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은 것도 드물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바뀌어진 트랜드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찾아온 변화 속에서 아직도 혼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안정이 되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지금의 변화의 흐름은 상당수 그대로 유지될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바이러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터닝 포인트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혼자 잘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를 겪으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미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서 혼자 지내는 것을 충분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물론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고립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시간이 지나도 더욱 나홀로 사는 것에 대해서 더욱 익숙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홀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만의 시간에 대한 생산적인 삶의 일정표를 잘 갖고 살아가는 연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어디에 있든지 더욱 자신을 믿음으로 바르게 지켜가는 성실한 삶이 요구됩니다.

둘째, 소명의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도전은 결국 이 시대를 살면서 앞으로 이 문제가 지나가도 제2 제3의 심각한 질병의 도전을 받을 수 있는 공포를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죽음 앞에서 삶의 만족은 소유에 있기보다는 소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좀더 자신의 삶에 대한 소명을 생각하면서 의미있게 살아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분명하게 알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나의 소명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속에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소명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경험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소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면 속에 믿음의 확신 뿐 아니라 외적인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셋째, 가치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보통 현대인들의 핵심가치는 소유지향적이고 도시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입니다. 그결과 돈을 향해서 도시를 중심으로 성공을 향해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소유를 더 가치로 삼고 더 좋은 집과 차를 누리고 편리한 도시에서 다양한 문화를 즐기면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익숙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가치들이 진정한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잘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도시를 즐기기보다는 더욱 자연을 친구로 삼는 삶이 필요한 것을 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앞에 인정받는 성공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 받기보다 하나님에게 매여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행복의 삶이 필요합니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가 되면서 온라인이 가장 뜨겁게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온라인으로 집에서 예배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온라인에 들어가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설교 동영상 실시간 예배 영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클릭하여 들어가서 동영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줌과 같은 온라인으로 서로 얼굴을 보고 미팅을 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상으로 준비된 강의를 서로 소통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 있어도 얼마든지 약속된 시간을 정하여 서로 온라인으로 만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다양한 모델들이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보통 3가지 정도의 모델이 대표적입니다. 첫째 반문화의 모델입니다. 문화를 사탄의 결과물로 보고 죄악시하는 모델입니다. 이 입장은 철저히 문화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반대하고 분리적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가령 지금도 미국의 아미쉬(Amish)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문화에 반대하고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복음을 고립되게 합니다. 둘째는 문화를 적용하는 동일시 모델입니다. 문화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를 알고 배우고 하나님을 위하여 적용하려고 합니다. 가령 본래 세상 음악의 악기였던 기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델은 복음을 위하여 문화를 적용하지만 때로 문화에 너무 지배당하여 세속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셋째는 문화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개혁의 모델입니다. 문화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완전하게 긍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가령 온라인같은 문화를 인정하지만 그 죄성을 인지하고 무분별하게 적용하지는 않는 태도입니다. 그 결과 문화의 죄성을 철저하게 경계하는 것입니다.

온라인으로 모임도 하고 예배도 하는 것은 부분적인 대안일 뿐입니다. 온라인상으로 드리는 예배와 모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은 마음을 다해 진정성있게 하나님 앞에 나갈 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선재하는 죄성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있을 경우에 과연 얼마나 하나님 앞에 나를 쳐서 진정성있게 나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은 한계를 드러냅니다. 웬만한 영성의 고수가 아니고서는 1시간동안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동안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자유롭게 열려있는 유혹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몸을 쳐서 복종하여 몸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몸으로 땀을 흘리고 고통을 겪으면서 운동을 할 때에 비로서 운동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 그리고 봉사와 같은 모든 활동은 몸을 쳐서 복종하여 땀과 수고의 댓가를 지불하는 전인격적인 체험이 될 때에 더 온전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세계가 패닉에 빠져 가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전염이 점점 확산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뉴욕도 이젠 일상의 삶이 마비되는 조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의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바이러스의 위기는 교회조차도 공적인 예배를 중지 하고 교회당의 시설을 폐쇄하는 믿음의 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유명한 기독교 상담자 미국의 노만 라이트(Norman Wright)는 위기의 적응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위기를 더 극대화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위기 가운데 대처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서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불안하게 느끼면서 어쩔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안한 감정은 위기의 대처 능력도 불안하게 됩니다. 먼저 위기를 감정적으로 대면하고 대처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위기 가운데 있을지라도 먼저 그 위기를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의 바울은 죽을뻔한 위기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특히 죽음이 기다리는 감옥에 갇히는 위기가운데 있을 때에 바울은 그 위기를 다르게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위기를 자기 연단의 기회로 여겼고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하여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신앙을 연단하는 기회로 삼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위기일지라도 신앙의 해석은 부족하고 죄악된 나를 더 온전하게 하는 기회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바라보아야 할 위기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은 무엇일까? 모든 위기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일어납니다. 좋은 일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일어나지만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나쁜 일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발생하는 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주권 가운데 모든 위기를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나쁜 위기의 일이든 좋은 위기의 일이든 하나님은 위기를 도구로 이용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역사 속의 많은 전쟁과 재앙들의 위기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위기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위기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기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위기는 기도의 기회입니다. 위기 가운데 보통 우리의 기도는 “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필요한 기도는 “하나님, 우리가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고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기 가운데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을 갖아야 합니다. 다윗이 시편23편4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위기를 통하여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을 통하여 더 깊은 연단의 기회 더 큰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계절의 여왕 5월은 자연을 통한 인생의 배움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선의 선물이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이지만 자연도 그에 못지 않은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자연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자연으로 시작해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뿐 아니라 신앙생활도 자연을 통하여 많은 것을 레슨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을 하나님의 일하심의 교과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기자는 시편19:1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일반계시인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자연은 자기 분수를 지키는 법을 가르칩니다. 자연은 자기 분량만큼 존재합니다. 나무는 그 위치에서 평생을 삽니다. 그 위치가 그늘이든지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이든지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위치에서 산을 빛내고 맑은 공기를 만들어내고 때로 새들의 거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때가 되면 썩어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때는 자기 위치를 지킬 때입니다. 부모는 부모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의 위치에서 성도는 성도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주신 위치에서 먼저 우리는 자기의 분수를 바로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자연은 공존의 관계를 가르칩니다. 모든 자연은 서로를 품게 됩니다. 모든 나무는 서로 함께 하고 모든 꽃들은 서로 함께 어울릴 때에 아름답습니다. 모든 자연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기 보다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상생의 관계를 갖습니다. 자연은 끓임없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항상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며 살아갑니다.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에는 섬길 때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섬김으로 공존의 관계가 가능합니다. 관계를 잘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욕심의 자기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관계를 잘 하는 사람들은 나를 통하여 남을 배려하고 팀을 생각하는 공존의 이유가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끓임없이 공존의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자연은 때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꽃이 피는 때는 채 2주일도 안됩니다.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벚꽃, 진달래, 매화와 같은 꽃들을 보면 피는 순간 이내 지고 맙니다. 그 잠깐의 꽃을 피우는 시간을 위해 1년 내내 뿌리부터 가지까지 모든 진액을 쏱아내며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모든 나무도 봄이 와서 잎을 내는 순간을 갖는가 하면 이내 가을이 되어 모든 잎은 쓸쓸히 떨어지는 때가 오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때가 꽃과 같고 나무의 잎과 같습니다. 피는 때가 있지만 지는 때가 속히 옵니다. 주어진 지금의 인생의 때를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죽음의 때를 준비하고 오늘이 그 죽음 앞에 있음을 알고 항상 주님 만날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가장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활성화하기를 원하는 부서는 다음 세대를 세우는 교육 부서입니다. 우리 교회 교육부서는 아직은 미숙한 걸음마 단계입니다. 그러나 올해 걸음마를 넘어서 잘 걷는 단계의 성장을 위해서 도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교육을 통해서 수준별 어린이들의 다양한 영적 필요를 잘 발견하고 채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린아이들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각 부서들이 더 잘 조직되어져서 잘 세워지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먼저 교회 교육을 위해서 연령별 아이들의 필요를 잘 채울 것입니다. 올해 교회에서는 아이들의 나이를 고려하여 세부적으로 교육 부서를 더 구분하여 운영하고자 합니다. 올해부터는 1-2세의 영아부를 신설하여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2층 교육관에서 예배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교회학교의 유아부 유년부 및 중고등부는 미남침례교단의 영어 성경교재를 작년 연말부터 채택하여 연령대의 수준에 맞게 더욱 통일성있고 일관성있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영아부 및 유아부까지는 한글로 진행하고 유년부부터 영어로 진행하여 아이들의 필요를 맞추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아이들의 필요를 잘 파악하고 채워주는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세워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육은 아이들이 부모들과 함께하는 공동체의 영성을 키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교육가운데 가장 도전이 되는 것은 부모와 자녀들의 세대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교육방식입니다. 그것은 바로 어려서부터 부모들과 함께 회당예배를 통해서 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1년에 몇 번 부모들과 함께 대그룹예배를 참석하여 함께 예배함으로써 어른들의 예배를 배우고 체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개별적인 존재감을 뛰어넘어서 전체의 회중공동체를 통해서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어려서부터 연합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아이들이 신앙 속에서 교회를 배우고 공동체를 배우게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교육의 질적인 성장을 위해서 계속해서 교사들의 영성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교회에서는 교육사역자들의 영성을 위해서 계속해서 교사학교를 진행할 것입니다. 교육과 관련한 이론과 실제적인 기술들을 내부강사 및 외부강사들을 통해서 교사들이 배우고 훈련하도록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외부의 좋은 세미나와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도록 할 것입니다. 다음 세대의 우리 아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교사를 키우고 세우는 교회로서 더욱 힘쓰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세우고 키우는 일은 마치 한그루의 나무를 심고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투자와 더불어 기다림이 요구되며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세워질 때에 교회는 든든한 미래가 있습니다. 지금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키울 때에 교회의 미래는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5년 10년 앞으로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면서 세워가는 우리 교회로 다함께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올 해 부터 우리 교회는 성경 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 1189장을 3년에 모두 쓰는 것이 목표입니다. 매일 1장을 쓰면 1년이면 365장 그리고 3년이면 모두 쓸 수 있습니다. 영어든 한국어 든 관계없이 공책에 매일 정확하게 쓰기를 하면 됩니다. 물론 성경 쓰기 공책은 교회에서 지정한 것으로 하여 3년 마치는 때에는 기록한 노트를 전체 제본을 하여 가정의 아름다운 신앙의 가보가 되게 할 것입니다.

매일 쓰기 한 성경 노트는 분기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로 갖고 와서 점검과 시상을 하게 됩니다. 성경 쓰기의 시상은 첫째, 목표한 성경 쓰기의 양 둘째, 바르고 정확한 쓰기의 질, 셋째, 성경 쓰기의 믿음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쓰기 성경 노트를 교회에 제출하면 쓰기의 양과 질을 심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쓰기의 마음과 자세는 성경쓰기 노트를 제출할 때에 3개월간 성경 쓰기 말씀 중에서 본인에게 가장 감동이 된 부분을 적어서 제출하면 살펴보고 시상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성경에 믿음을 매이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도전을 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성경 문제 풀기, 성경 요절 외우기 등을 했고 이번에는 성경 쓰기를 합니다. 그동안 성경을 더욱 알기 위해 많은 성도님들이 열심히 참여를 했고 이번에 성경쓰기에도 많은 분들이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거룩한 매임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과 믿음은 보이는 외적인 훈련을 통한 매임을 통해서 더욱 거룩하게 연단 되어야 합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성경 쓰기는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고 마음을 하나님에게 매이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성경 쓰기를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목표한 것을 성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경 쓰기를 마지막까지 잘 마칠 수 있을까? 첫째, 믿음으로 성경 쓰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쓸 때에 믿음의 연단이 됩니다. 둘째,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의 도움이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셋째,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 1장을 쓸 때에는 그래도 쉽지만 이틀 혹은 삼 일을 미루면 벌써 부담이 됩니다. 그러면 기쁨보다는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성경 쓰기를 통해 상도 받고 가정의 가보가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본은 성경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를 소원하십니다.날마다 성경 쓰기를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으면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모두가 승리하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한 이민교회의 인터넷신문사에서 10년 뒤의 이민교회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위한 캠페인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취지의 캠페인을 하는 것은 이민교회의 현실을 위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민교회의 현재의 실상은 마치 점점 폐가가 되는 집처럼 무너져내려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주일학교 어린 아이들의 숫자가 없다는 것과 교회에 새신자가 유입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교회들은 점점 노령화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문을 닫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침체되는 이민교회의 보편적인 실상의 현실은 미국의 모든 도시에 흩어져 있는 어떤 이민교회도 예외없이 점점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이런 이민 교회의 침체 현상은 사회적인 현상과도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민자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점점 세상은 반교회적인 문화로 교회를 거부하고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가는 것들이 그 이유가 됩니다.그러나 궁극적인 이유는 교회 외부에 있기보다 우리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내부의 문제는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누적된 결과로 오는 현실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교회 학자 죠지 바나는 20세기 때에 교회를 진단하면서 21세기 교회의 미래를 예측하면서 의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했습니다.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불을 지피면 개구리는 죽어가는 줄 모르고 물 속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게 되면 놀라서 즉시로 튀어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망가지고 죽어가는 이유는 현실에 대한 위기의 각성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가장 문제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이민교회의 침체 현상은 먼저 우리 안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중심은 말씀과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말씀 없는 기독교가 되고 있습니다. 점점 기도 없는 기독교가 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점점 말씀을 대체하고 기도를 대체하는 인본주의적인 교회 이벤트와 행사와 프로그램들이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위하여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철저하게 어린아이들에게 기도와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비젼 있는 미래 교회를 위해서 지금 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항상 문제는 복잡하지만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 교회의 10년 뒤의 부흥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매일 반복해서 지금 그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2007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목회의 쉼과 공부의 시간을 위해 애틀란타에서 갖았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아내와 차를 몰고 비교적 먼 목적지를 운전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을 잘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라 지도를 의지해서 목적지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방향감각이 없는 터라 속도를 내어 열심히 운전을 해서 갔지만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이었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을 헤메고 간신히 나중에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네비게이션없이 운전을 할 때 방향 감각 때문에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그러나 목적지의 방향을 좇지 않는 열심의 속도는 헛된 수고가 될 뿐입니다.

매일 우리의 신앙 생활도 운전을 하는 것처럼 먼저 방향을 바로 알고 해야 합니다. 지금은 운전을 할 때에 올바른 목적지를 위해서 네비게이션이 방향을 잘 안내하기 때문에 그 안내대로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네비게이션대대로 방향을 설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삶에 익숙한 우리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대로 경험대로 방향을 설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자기가 정한 신앙의 방향으로 갈 때에 하나님의 길에서 탈선하고 배도의 길을 가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의 주님이 세상의 그리스도인의 길의 방향은 좁은 길을 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자기 소견대로 자기의 방향대로 가는 어떤 류의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많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넓은 길의 방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앙의 길을 자아 도취의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점점 현대인들은 “ 내가 나의 운명의 주인이고 내 영혼의 선장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이런류의 세상의 자기 방향에 초점을 모으는 사람들의 생각이 기독교 내부에 이미 침투해 버렸습니다. 그결과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의 영광에 맞추려고 합니다. 만일 나 중심주의 신앙의 방향을 향해 우리가 열심의 속도를 낼 경우에 결국은 허무함 뿐일 것입니다.

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의 궁극적인 방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입니다. 이미 종교개혁가들과 청교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을 냅니다.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살고자 할 때에 마음을 지켜주시고 이길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숫자는 항상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소수였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그 소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까지 이루셨습니다. 점점 이 시대의 기독교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기 중심의 기독교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의 방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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