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계속되는 코로나바이러스 시대를 살면서 상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상한 마음은 마치 맛을 잃은 혀처럼 인생의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음은 마치 자동차의 엔진과 같습니다. 엔진이 망가지면 차는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엔진으로부터 모든 부품에 힘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상한 마음은 몸의 모든 곳곳을 아프게 합니다. 그 결과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영향을 줍니다.

상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만드신 분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고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몸의 의사기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의사이기도 합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고장 나면 세상의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원의사는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치는 기술을 성령님을 통해서 인도하고 성경을 통해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통해서 마음을 고치는 일을 행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의 인도의 처방을 받는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공급하게 합니다. 마치 병원에서 의사가 처방을 내리듯이 약국에서 약사가 처방을 내리듯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꾼들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처방을 받아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진료하게 하십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대로 그대로 마음에 믿고 적용해야 합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처방하여 준 지시를 환자가 따를 때에 치료가 됩니다. 만일에 환자가 자기의 생각대로 고집하면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치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처방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일꾼들이 가르쳐주고 전달하여 준 처방을 믿음을 따르는 자에게는 약속대로 고쳐지고 회복이 됩니다.

몸의 치유를 위해서 병원이 필요하고 의사가 존재하듯이 마음의 치유를 위해서는 교회를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영혼의 의사인 목사를 허락하였습니다. 목회의 현장에서 많은 상한 마음의 성도들 중에 치유를 경험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치유 받은 자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교회를 귀하게 여기고 목회자들의 영적인 진단의 처방을 받고 그대로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의 의사를 통하여 일을 하듯이 교회의 목회자들을 통하여 일을 하십니다.

상한 마음은 반드시 치유 받아야 합니다. 치유 받지 않은 상한 마음은 쓴뿌리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의 삶도 망가지게 합니다.그리고 남들에게는 부정적인 관계를 하면서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영육이 건강하여서 그리스도안에서 행복한 삶으로 승리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번 주간 금요일 부터 시작되는 10주간의 영적 치유의 모임을 통하여 함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히12: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요즘 한국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재발하여 위험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코로나바이러스가 재발되는 원인으로 교회가 집중적으로 조명되면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듣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8.15 광복절 집회에 대규모로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회를 통하여 많은 감염자가 발생했고 그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통하여 또다시 감염되었다는 것이 뉴스와 언론의 주장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재확산으로 지금 한국 교회들은 다시 대면 예배가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교회들은 정부의 예배 금지 명령을 어기고 대면 예배를 강행함으로 인해서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몰래 숨어서 예배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언론에 뉴스로 교회들의 이런 모습이 방영됨으로 인해서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코로나바이러스를 맞이하여 모든 교회는 방역의 본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행과 섬김으로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8.15 광복절 집회 이후에 한국의 일부 교회에서는 집회 금지 명령을 정부가 교회를 박해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미 교회를 중심으로 환자가 발생한 상황에서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두명도 아니고 객관적인 많은 환자의 숫자가 나왔으면 다소 억울함이 있어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힘든 시기에 교회는 먼저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정부의 명령을 따라 대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탄합 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게 하기 위함이요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에 어떤 목회자들은 정치적 선동으로 교회들을 조정하려고 하고 있고 여기에 교회가 이용당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 현장에서 위험을 무릎 쓰고 사회적 명령을 어기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앙이 아니요 교만한 교회의 오기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유대의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적인 종교의 오만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시간을 이용하여 종교화된 교회의 관행적이 습성을 돌아보게 하는 훈련의 기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시대 가운데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교회가 교회다움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의 교회다움은 주님같은 마음과 행실로 겸손히 낮아져서 세상을 빛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 시대 가운데 상한 영혼들을 주의 말씀으로 섬기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예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점점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시간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갑갑하고 답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중되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불안감을 가중하게 됩니다. 사회적 격리 시간을 오래 갖게 되면서 점점 마음도 삭막하게 변한다고 합니다. 특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시간에 대한 답답함으로 삶의 즐거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어지고 가중되는 고난의 시간을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백성답게 의미있는 시간으로 보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불과 같은 시험의 고난의 때를 잘 통과하여 거룩하게 빛나는 보석같이 되어지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가장 고난의 삶을 잘 이겨낸 사람은 욥입니다. 욥은 자녀,재산,건강,친구등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가장 큰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 고난의 때에 욥의 우선적인 고난의 반응은 부정적인 해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먼저 찬송하고 경배하면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욥은 엄청난 고난의 때를 연단의 때로 살았습니다. 욥은 고난의 때를 잘 연단을 받게 될 때에 순금같이 되어질 것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고 일정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기도하면서 거룩하게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인내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3명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정죄하고 공격하여도 그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켰습니다. 고난의 때를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잘 연단한 욥의 결국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고난의 때를 자기 연단의 때로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성경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고난의 시간을 허용하셨습니다. 애굽의 430년, 광야의 40년, 바벨론의 70년의 고난의 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난의 때를 자기 백성의 믿음의 연단의 때로 사용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비록 그 고난의 때를 보내는 것은 분명히 고통스럽지만 결국은 합력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기회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난의 때를 보내면서 잘 연단 되어진 사람들은 거역하던 교만한 마음을 다듬고 부드럽게 낮아지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인격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고난의 시간을 연단의 기회로 삼고 승리하면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각자의 거룩한 결단의 영적 의지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타락된 자유의지는 고난이 와도 여전히 죄의 속성대로 자기 자유를 좇아 살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고난이 올 때에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불안한 삶 가운데 더 자기 중심을 좇아 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더 이기적이 되고 더 본능적이 되고 더 죄의 소욕대로 자신을 내어주면서 동물적인 본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의 때에 하나님은 더욱 자기 백성에게 견디고 이길 수 있도록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고난도 허용하시지만 그 고난을 피하고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들을 더욱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난의 때를 연단을 잘 받고 통과하여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선한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10)

 

우리의 신앙은 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몸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시작은 내가 나의 몸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종종 나의 몸을 사랑하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몸을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몸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적이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역사에서 대표적인 이단 사상 중에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당시의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한 사상이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가 교회 속에 침투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혹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의 니골라당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영지주의 주장은 한마디로 몸에 대한 잘못된 이원론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몸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혼 만을 강조하고 몸을 부정하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영지주의 이단은 지금까지 교회 가운데 영혼만이 귀한 것이므로 육체적인 행동을 부정하게 만드는 문제를 낳게 만들었습니다.

몸에 대한 헛된 이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꾸 영적으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객관적인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육체의 모든 활동을 무시합니다. 가장 문제점은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몸을 거룩하게 사랑하는 법을 무시합니다. 자칫 겉으로 보면 거룩하게 보이는 것처럼 오직 영적인 활동을 하는 것만이 경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과거에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하게 여기고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운동을 거부하고 자꾸 영혼을 앞세운 영적인 활동만을 주장합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 건강한 몸을 통한 거룩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전된 몸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애에 근거한 몸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몸 가운데 성령을 모시고 있기에 내 몸을 거룩하기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몸을 통해서 일 가운데 삶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기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 몸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몇가지 적용이 필요합니다.

첫째, 몸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고전6:19).

둘째, 몸을 구별되게 거룩하게 하는 것이 나의 몸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벧전1:15).

셋째, 몸을 사랑하는 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몸을 건강하게 잘 지켜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고전10:31).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를 살아가면서 무엇보다도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건강하게 잘 보존하기를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며 교제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지금으로 구약으로 말하면 성전이었습니다. 아담은 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살아있는 예배를 경험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마음과 삶 가운데 신령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서 참된 예배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참된 예배를 경험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은 노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노아의 삶도 예배하는 삶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거역하였을 때에도 외롭게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삶의 바른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께 구별된 제단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삶의 예배도 제단 예배도 드림으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에게 드렸습니다.

참된 예배를 대표하는 구약의 인물은 바벨론 포로 이후 시대의 에스라입니다. 그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살아있는 예배를 회복합니다. 금식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바른 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에스라를 중심으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제사장 중에서 결혼하였던 이방 여인들을 다 돌려보내는 결단을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참된 예배자의 복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참된 예배의 바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수가성에서 만난 여인을 통하여 살아있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과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되 예수님을 중보자로 삼아서 성령으로 예배하고 말씀의 진리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거룩한 분노를 보여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예배를 위해서 전통과 형식을 잘 사용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하여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날이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당에서 드리던 예배가 집에서 혼자 또는 가족들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장소가 바뀌었어도 예수님을 중보자로 삼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있는 예배가 드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구약에서 신약에서 참된 예배의 실패를 거울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로서 우리 자신들을 점검하고 바르게 세워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참된 예배는 참된 예배자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먼저 삶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예배자의 삶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둘째, 참된 예배자로서 형식을 따라 드려지는 공적 예배는 성령님의 인도를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찬송과 기도와 순종이 참된 예배를 가능하게 합니다. 셋째, 무엇보다도 공예배를 드릴 때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참여해야 합니다. 온라인 예배의 주의점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과 몸이 참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성경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계획이 잘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구약을 통하여 준비하셨고 신약을 통하여 완성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준비셨습니다. 마침내 언약의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구원주를 준비하시고 아울러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마침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곳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마귀가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곳에는 분쟁과 싸움과 미움이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기까지 세상을 허용하지만 마침내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심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완성하시고 아직 완전한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시간은 이미와 아직의 중간기입니다. 이 중간기를 하나님은 통치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사람들을 부르는 사명을 불신자에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삶을 기다리십니다. 지금 이 때를 향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과 심판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세상 가운데는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고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고 궁극적으로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코로나바이러스와 다양한 자연재해와 전쟁과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더 심각하게 지구촌 곳곳마다 심각한 재앙들로 인해서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건과 사고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먼저, 재앙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사인의 계획입니다.마치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시는 계획이 있듯이 모든 재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사인입니다. 둘째, 예수그리스도에게에게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재앙은 인간의 무력함을 알게 하고 구원주되시는 예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사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계획 앞에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임박한 구원을 더욱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세상의 구원주가 될 수 있음을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알리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우선적인 사명은 구원의 복음을 말과 삶과 섬김을 통하여 더욱 알리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위험한 수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은 뉴욕과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더 심각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염성은 아직도 위험한 수준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위험한 수준의 삶이 이제는 뉴노멀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뉴노멀, 즉 새로운 표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뉴 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불편한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의 일상들이 전부 멈추어서게 된 정황입니다. 학생들은 학교 교실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대면하여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일상적으로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규제를 받고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는 일도 이제는 위험한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일상의 삶이 중지되면서 일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꿈이 되어 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뉴 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일상적인 공동체 교회의 예배를 현장에서 자유롭게 드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예배라는 기형적인 새로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함께 교회당에서 모여 식사 교제를 하던 일도 어렵고 작은 공간에서 서로 모이는 모임이나 훈련을 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다양한 모임을 통해서 경험하였던 다양한 은혜의 기회들이 줄어들게 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더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뉴 노멀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신앙은 어떤 것일까?

우선, 복음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본기는 복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구원주로 믿고 삶의 주로 고백하고 경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은 오직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신앙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질 때에 우리의 삶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더욱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것은 복음 중심이 되기를 소원하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둘째,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뉴 노멀 시대는 위험한 상황을 앞세운 실용주의, 자기를 앞세운 이기주의,그리고 경제를 앞세운 맘모니즘이 우상이 될 위험이 더욱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삶과 생각과 행위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의 권위인 것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뉴 노멀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성경을 가까이하고 날마다 꾸준한 묵상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교회 공동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수많은 박해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교회와 함께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와주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 하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센터이기 때문입니다. 뉴 노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교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이렇게 단기간에 전세계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은 것도 드물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바뀌어진 트랜드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찾아온 변화 속에서 아직도 혼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안정이 되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지금의 변화의 흐름은 상당수 그대로 유지될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바이러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터닝 포인트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혼자 잘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를 겪으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미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서 혼자 지내는 것을 충분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물론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고립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시간이 지나도 더욱 나홀로 사는 것에 대해서 더욱 익숙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홀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만의 시간에 대한 생산적인 삶의 일정표를 잘 갖고 살아가는 연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어디에 있든지 더욱 자신을 믿음으로 바르게 지켜가는 성실한 삶이 요구됩니다.

둘째, 소명의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도전은 결국 이 시대를 살면서 앞으로 이 문제가 지나가도 제2 제3의 심각한 질병의 도전을 받을 수 있는 공포를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죽음 앞에서 삶의 만족은 소유에 있기보다는 소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좀더 자신의 삶에 대한 소명을 생각하면서 의미있게 살아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분명하게 알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나의 소명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속에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소명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경험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소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면 속에 믿음의 확신 뿐 아니라 외적인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셋째, 가치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보통 현대인들의 핵심가치는 소유지향적이고 도시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입니다. 그결과 돈을 향해서 도시를 중심으로 성공을 향해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소유를 더 가치로 삼고 더 좋은 집과 차를 누리고 편리한 도시에서 다양한 문화를 즐기면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익숙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가치들이 진정한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잘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도시를 즐기기보다는 더욱 자연을 친구로 삼는 삶이 필요한 것을 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앞에 인정받는 성공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 받기보다 하나님에게 매여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행복의 삶이 필요합니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가 되면서 온라인이 가장 뜨겁게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온라인으로 집에서 예배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온라인에 들어가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설교 동영상 실시간 예배 영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클릭하여 들어가서 동영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줌과 같은 온라인으로 서로 얼굴을 보고 미팅을 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상으로 준비된 강의를 서로 소통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 있어도 얼마든지 약속된 시간을 정하여 서로 온라인으로 만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다양한 모델들이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보통 3가지 정도의 모델이 대표적입니다. 첫째 반문화의 모델입니다. 문화를 사탄의 결과물로 보고 죄악시하는 모델입니다. 이 입장은 철저히 문화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반대하고 분리적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가령 지금도 미국의 아미쉬(Amish)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문화에 반대하고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복음을 고립되게 합니다. 둘째는 문화를 적용하는 동일시 모델입니다. 문화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를 알고 배우고 하나님을 위하여 적용하려고 합니다. 가령 본래 세상 음악의 악기였던 기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델은 복음을 위하여 문화를 적용하지만 때로 문화에 너무 지배당하여 세속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셋째는 문화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개혁의 모델입니다. 문화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완전하게 긍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가령 온라인같은 문화를 인정하지만 그 죄성을 인지하고 무분별하게 적용하지는 않는 태도입니다. 그 결과 문화의 죄성을 철저하게 경계하는 것입니다.

온라인으로 모임도 하고 예배도 하는 것은 부분적인 대안일 뿐입니다. 온라인상으로 드리는 예배와 모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은 마음을 다해 진정성있게 하나님 앞에 나갈 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선재하는 죄성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있을 경우에 과연 얼마나 하나님 앞에 나를 쳐서 진정성있게 나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은 한계를 드러냅니다. 웬만한 영성의 고수가 아니고서는 1시간동안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동안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자유롭게 열려있는 유혹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몸을 쳐서 복종하여 몸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몸으로 땀을 흘리고 고통을 겪으면서 운동을 할 때에 비로서 운동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 그리고 봉사와 같은 모든 활동은 몸을 쳐서 복종하여 땀과 수고의 댓가를 지불하는 전인격적인 체험이 될 때에 더 온전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세계가 패닉에 빠져 가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전염이 점점 확산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뉴욕도 이젠 일상의 삶이 마비되는 조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의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바이러스의 위기는 교회조차도 공적인 예배를 중지 하고 교회당의 시설을 폐쇄하는 믿음의 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유명한 기독교 상담자 미국의 노만 라이트(Norman Wright)는 위기의 적응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위기를 더 극대화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위기 가운데 대처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서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불안하게 느끼면서 어쩔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안한 감정은 위기의 대처 능력도 불안하게 됩니다. 먼저 위기를 감정적으로 대면하고 대처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위기 가운데 있을지라도 먼저 그 위기를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의 바울은 죽을뻔한 위기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특히 죽음이 기다리는 감옥에 갇히는 위기가운데 있을 때에 바울은 그 위기를 다르게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위기를 자기 연단의 기회로 여겼고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하여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신앙을 연단하는 기회로 삼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위기일지라도 신앙의 해석은 부족하고 죄악된 나를 더 온전하게 하는 기회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바라보아야 할 위기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은 무엇일까? 모든 위기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일어납니다. 좋은 일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일어나지만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나쁜 일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발생하는 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주권 가운데 모든 위기를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나쁜 위기의 일이든 좋은 위기의 일이든 하나님은 위기를 도구로 이용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역사 속의 많은 전쟁과 재앙들의 위기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위기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위기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기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위기는 기도의 기회입니다. 위기 가운데 보통 우리의 기도는 “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필요한 기도는 “하나님, 우리가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고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기 가운데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을 갖아야 합니다. 다윗이 시편23편4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위기를 통하여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을 통하여 더 깊은 연단의 기회 더 큰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Page 23 of 32 1 21 22 23 24 25 32

© 2023 Mahanaim Church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