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덧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긴 어둠의 터널같은 한해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올 해 여름이면 끝날 것이라고 했던 코로나의 위기의 시간들은 결국 가을을 지나 겨울에 이르게 되어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내년이 되어도 어느 시기까지 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변형된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발생하면서 모든 나라들이 더 긴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현상만 보고 삶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여서는 안됩니다. 사건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과연 이 전염병이 유행하는 시기에 한해를 보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한해를 보내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앞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비록 심각한 재난의 전염병일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발생한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하나님이 병을 주실 때에는 인간들의 반역과 불신앙 우상숭배 교만등에 대한 심판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욥과 같은 경우에는 까닧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코로나바이러스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이 모든 위기를 멈추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한해를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더욱 살피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원하는 것은 정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구별되어 정결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정결하게 헌신하면서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교만과 욕심 속에서 세상의 유행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더욱 우리 자신들의 깊은 내적인 마음의 성찰과 정결한 몸을 회복함으로 더불어 정결한 신앙으로 자신을 드리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셋째, 한해를 보내면서 이웃과의 관계를 더욱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올해는 더욱 남을 돌아보고 섬기고 나누는 덕과 사랑이 필요한 한해였습니다. 주변에 보면 물질적인 어려움, 정서적인 어려움등으로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그들을 위하여 기도로 물질로 몸으로 섬김이 필요한 한해였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남몰래 섬김의 선행을 베푸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숨은 섬김의 선행자들로 인해서 세상은 힘과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욱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렵고 힘든 이웃을 향하여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 마음을 넓히고 이웃들을 섬기는 일에 시간과 몸과 물질로 섬기는 구체적인 섬김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내일을 향하는 좋은 발판의 기회가 됩니다. 고난 속에서 보낸 올해의 모든 삶들은 새로 맞이하는 내년을 향하여 더욱 준비하고 훈련하는 선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위기의 한해를 보내면서 더욱 새해를 믿음으로 잘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특별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기쁨이 사라진 시대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라틴어 Christus와 모임의 massa의 합성어로서 의미는 그리스도 모임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배의 날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은 소개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이나 규례가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주후 3세기 경부터 지킨 것으로 소개됩니다. 로마교회 대주교인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하고 350년부터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를 넘어서 세상적인 명절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크리스마스가 되면 세상사람들은 가족들과 모여 음식을 먹는 날, 선물을 주고 받는 날, 아름다운 장식을 하는 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위한 장식들과 나무들이 판매가 됩니다. 또 미국의 경우에는 크리스마스 때에 먹는 특별한 음식과 음료가 있을 정도입니다. 크리스마스 사탕, 쿠키와 같은 것들은 이미 상품화되어 판매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예수님의 탄생의 기쁨과는 관련없이 이루어지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탄생과는 관련 없는 세상의 사람들의 자기들을 위한 축제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경배를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동방박사들이 누가복음에서는 목자들이 소개됩니다. 우선 동방박사들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마태는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이스라엘의 기준에서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목자들은 당시에 이스라엘의 분위기로서는 가난하고 무시 받던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는 자들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할 때에 철저하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시간과 몸과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경배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우선, 세상의 풍속을 좇지 말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선물받고 노는 날이 아닙니다. 점점 세상은 사람이 중심이 되고 신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 결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즐거워하게 하려고 합니다. 점점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먼저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크리스마스를 지키되 예수님을 즐거워하고 경배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교회가 우선 해야 할 일은 기쁨과 즐거움의 예배입니다. 많은 경우에 예배의 즐거움이 사라진 시대의 믿음 생활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기뻐할 때에 주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먼저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즐거워하는 예배입니다.
셋째, 나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여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을 받는 날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남에게 선물을 주고 나누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큰 선물인 예수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해의 결산의 때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너무도 무력하게 시간만 흘러간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에는 교회의 재정과 행정 결산을 해야 합니다. 본격적인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이 3월부터 시작이 되었고 결국 한 해 모든 계절 내내 코로나와 동행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직도 위기를 계속되고 과연 어떻게 앞으로 전개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정황에서 한해의 마무리 시점을 맞이한 것입니다.
첫째 재정 결산을 돌아보면 지난 1년동안 재정적으로 힘든 한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적으로 최선으로 헌금으로 충성스럽게 헌신한 분들이 계십니다. 매주 재정부를 통해서 올라오는 헌금자들의 명단과 헌금 액수를 보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어렵고 힘든 정황에서도 개인적으로 낭비 하지 않고 아껴서 헌금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십일조를 드리고 각종 목적으로 헌금을 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요 영광과 감사를 받으실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물질의 헌신을 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유형교회가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바울은 어렵고 힘든 환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헌금을 한 마게도냐의 교회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헌신을 드리는 삶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드림과 심음의 기회가 되어 더 큰 하나님의 열매를 거두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재정 결산을 통하여 어려운 시기에도 함께 귀한 헌신을 담당하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둘째, 교회 모든 사역에 대한 결산입니다. 올해는 교회의 대부분의 사역들을 계획대로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본래 내년 연초에는 안수집사와 권사들을 피택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정대로 훈련이 진행되지 못하여 1년 더 연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년 가을에 임직식을 하려고 했었는데 2022년 가을에 임직식을 연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올해는 모든 제자훈련을 중단하고 미루는 관계로 개인적으로는 너무 안타까왔습니다. 내년에는 제한적이지만 제자훈련을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목장 모임과 사역들도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물론 온라인이나 간헐적으로 목장 모임이 있었지만 내실있는 모임이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목장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베스트 초대의 날도 생략되었고 코리안 푸드 페스티발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예배는 중단되지 않고 온라인과 대면으로 드리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렇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모든 사역이 중단됨으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과의 관계를 집중하면서 영적인 내실을 점검하고 쌓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더 풍성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실재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기회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고 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해 모든 교회 사역들이 대부분 중단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한해의 결산 앞에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해를 돌아보면서 인간의 무력하고 부족함의 한계를 철저하게 경험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인도를 의지하고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막상 멀리서 지켜보던 고난이 나에게 올 때에 고난의 현실감은 너무 다릅니다. 남의 고난을 지켜볼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고난에 대한 이론을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나의 고난이 되면 허둥지둥 마음의 갈피를 잡기 어렵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이기는 충분한 마음의 훈련이 안된 채로 우리는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서 훈련으로 다진 삶은 두렵고 힘든 고난이지만 보다 더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나가서 입상을 하는 최고의 선수들의 공통점은 실전같은 연습을 하기 때문입니다. 피나는 실전같은 연습은 실전에 가서도 그대로 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도 몸도 연습되고 훈련된 대로 자동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충분하게 익숙하게 잘 훈련된 선수는 어떤 상황의 어려운 선수를 만나도 익힌 기술과 훈련된 몸으로 위급한 상황을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훈련이 없는 선수는 조그마한 고난이 와도 결국 그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의 연속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나의 몸의 소욕을 거부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연습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의 욕망은 더 편안하고 더 즐겁고 더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 소욕을 거부하고 주님과 함께 더 교제하고 순종하는 자리에 나가는 삶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주님과 함께 깊은 교제로 연습 된 사람은 특별한 고난의 삶도 일상처럼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에서 승리하는 삶은 일상의 삶에서 이미 결정됩니다.
일상의 삶을 주님과 함께 잘 훈련된 사람은 마음의 근육이 잘 결정되어 있습니다. 우선 일상의 삶의 훈련은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합니다. 마음이 조화롭게 잘 발달된 사람은 안정감이 있습니다. 고난의 급한 상황에서도 주님으로 인한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현실이지만 빛된 주님을 의지하기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주님을 일상 속에 경험한 마음은 고난 앞에서 더 능력을 발하게 됩니다. 일상의 삶의 훈련이 잘 된 사람은 고난 중에서 담대하게 직면하여 극복합니다.
성경의 사도 바울은 고난의 어려운 삶의 경기를 잘 이긴 참피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일상의 삶을 항상 훈련하는 선수처럼 잘 이겼습니다. 그 결과 사역의 고난의 현장에서도 로마 감옥의 고난의 현장에서도 고난을 항상 이기는 승자로 살았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일상 속에서 주님의 능력이 어떻게 승리로 경험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일상의 승리가 고난의 승리로 연결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고난 앞에서 승리는 일상의 삶에서 힘을 키울 때에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스스로 훈련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거룩한 소원이 필요합니다. 운동선수처럼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은 간절한 소원은 모든 것을 그 소원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매일 일상의 삶에서 날마다 바라보고 지켜보아야 것은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일상의 삶에서 매일 주님과 함께 살고자 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이김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승리합니다. 그 주님의 능력과 승리로 일상에서 훈련된 사람만이 고난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기며 승리하는 경험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계속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이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 매일 1000여명 이상의 사망자와 더불어 확진자율이 3%대를 넘고 있습니다. 최소 100명당 3명이상이 코로나에 걸리는 비율입니다. 문제는 겨울을 맞이하여 점점 그 수치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안타깝게도 최근에 확진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적으로 확진자 집사님들과 접촉한 다수의 분들이 코로나 테스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다른 사람은 별다른 확진자 소식은 없는 정황입니다. 이런 정황에서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하여 바른 태도를 갖으면서 이 상황을 이겨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하여 지나친 두려움을 갖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질병이든지 지나치게 두려움을 갖는 것 자체가 그 병에 패배하는 길입니다. 두려움은 마음의 기능을 약하게 합니다. 그 결과 몸과 삶을 부정적으로 마비됩니다. 두려움을 갖는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입니다. 어떤 질병과 같은 상황을 만나도 두려움을 버리고 마음에 갖아야 할 자세는 두려움을 버리고 담대함을 갖아야 합니다. 심지어 지금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어도 이겨낼 수 있다는 담대한 마음을 갖을 때에 몸도 삶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상황에서 우리는 생명의 주관자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의지하면서 담대하게 이겨내야 합니다.
다음,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하여 지나치게 무시하는 태도를 피해야 합니다. 너무 코로나바이러스를 쉽게 생각하고 조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면서 조심하는데 착용을 부하거나 거리 두기를 무시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경솔한 태도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코로나를 무시하는 분들 중에 하나님을 앞세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지켜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마치 초믿음적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미 벌어진 상황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섭리를 조심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고난과 위험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면 조심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셋째,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겨나가는 바람직한 태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더불어 우리 인간의 조심의 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먼저 코로나바이러스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의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을 선고 받고 통곡하면서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그의 생명을 연장하여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간절한 기도와 함께 위험한 이 시기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이겨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적으로 12월 한달 동안 코로나바이러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더 집중하여 갖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현재의 위험을 조심하면서 이겨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고 위험한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위험한 시기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조심의 책임을 다하면서 지혜롭고 담대하게 이겨나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0년은 코로나바이러스의 한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지난해 겨울에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는 올해 1월에 한국에 유행을 시키고 미국은 3월부터 유행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교회의 경우에도 유례없는 온라인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경험하였던 교회에서의 교제와 양육과 훈련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올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교회적으로는 감사할 조건이 별로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면 여전히 교회 가운데 많은 감사의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교회적으로 올해 감사할 것은 위험한 시기이지만 생명의 복으로 함께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코로나시간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한 분의 집사님이 천국으로 인도받음 받는 복을 경험하였고 두 가정이 아기를 잉태하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가운데 여러 명의 아기들이 잘 자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잉태하게 하시고 출산하게 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지난 1년 동안 우리 교회 공동체 가운데 다양하게 일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둘째, 위험한 시기 가운데 서로 나누고 도우면서 섬김을 실천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가정과 사업과 직장이 안전하지 못한 지난 일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위기로 말미암아 마음의 위기도 나타나고 그 결과 관계의 위기까지도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시간을 살아가면서 약한 자를 서로 나누고 돕고 함께 하려고 하는 교회의 모습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교회 가운데 연약하고 힘든 지체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해서 나누고 가정을 찾아가서 벗이 되어 서로 위로하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약한 자를 도우려고 하는 선한 손길의 섬김으로 함께 하여 주신 모든 교회의 식구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셋째,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의 은혜를 갖으면서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고 영적으로 섬겨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혼자서 지속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 가운데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하나님의 거룩한 눈을 의식하면서 영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분들이 교회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는 것은 교회의 거룩한 영적인 네트워킹을 하는 일입니다. 지속적으로 교회의 영적인 회복을 위하여 영적으로 쓰임 받는 분들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넷째, 여전히 위험한 기간에도 교회공동체를 몸을 드려 희생하여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교회공동체가 땅과 건물을 함께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은 많은 희생과 섬김이 필요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나오셔서 교회의 많은 나뭇가지를 잘라주고 더러운 주변을 청소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화장실과 더러운 방들을 정리하고 다양한 비품들을 정리 정돈하면서 청소하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예배시간에 맞추어 예배를 위하여 준비하고 섬겨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가 더욱 감사의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함께 모두 감사의 영광을 돌리기를 소원합니다.
본래 사람의 생득적인 모습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미 태어날 때에 우리는 웃으면서 태어나기 보다 울면서 태어납니다. 자라가는 과정에 수없이 받으면서도 감사보다는 불평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공부를 해도 일을 해도 무엇을 해도 우리는 감사할 이유보다는 불평하고 분노하는 이유가 더 많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미 죄 중에 잉태하고 죄중에 태어나고 죄중에 살아가는 우리 인생은 생득적으로 감사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자꾸 반복하여 훈련되고 적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절기를 구별하여 감사하기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감사를 명령하십니다. 감사는 우리 인생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사의 인생으로 초대하십니다. 우선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통해서 끓임없이 사랑과 은혜를 베풀면서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1년 365일 자연 속에는 온통 감사의 이유들로 충만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바다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해야 할 것들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우주 만물 속에는 감사할 것들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는 것을 소원하십니다. 성경의 시편의 시인은 자연을 보고 감사를 훈련했습니다. 산을 보면서 돌을 보면서 구름과 바람을 보면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감사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을 열매를 보면서 감사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인격을 통해서 감사를 훈련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입술로 몸으로 물질로 감사를 자꾸 훈련해야 합니다. 먼저 마음에 감사를 훈련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품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습관을 길들여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의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의 믿음이 있는 사람이어야 가능합니다. 나의 관점으로 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범사를 보는 사람이 범사에 마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감사의 입술로 감사의 몸으로 감사의 물질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표현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웃들에게도 우리는 감사를 자꾸 표현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감사가운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감사가운데 감사를 더 낫게 하는 긍정과 밝음이 영향력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대는 더욱 감사를 배우는 기회가 됩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을 돌아보면서 감사하게 합니다. 날마다 호흡하고 살았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적인 가정의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교회당에서 찬송하면서 예배하는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감사의 일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감사하는 가정의 삶이 부족했습니다. 감사하는 교회생활이 부족했습니다. 감사하는 직장 생활이 부족했습니다. 감사하는 매일의 삶이 부족했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 작은 것 하나에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06:1)
엎치락 뒤치락 마치 승부를 알 수 없는 운동경기처럼 스릴 있는 선거였습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두 후보자 중에서 아직 최종 승자는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민주당 바이든 후보로 기울은 정황입니다. 승리에 필요한 선거인단 270명의 숫자가 거의 채워지는 정황에서 민주당은 정권인수 준비를 공표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 입장에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당분간 혼전의 나라 정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거를 보면 민심의 흐름을 보게 됩니다. 미국이란 나라의 민심도 지역색을 무시할 수 없는 느낌입니다. 민주당은 미국의 동쪽 서쪽 북쪽 지역에서 표를 많이 얻었습니다. 공화당은 남쪽과 중부 지역 쪽에서 표를 많이 얻었습니다. 민주당은 이민자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더 많은 지지를 얻고 공화당은 백인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표를 많이 얻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은 각 정당의 정책과 지금까지의 그 당의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번에 전통적인 공화당의 강세 지역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기도 한 것은 언제든지 자신들을 위한 정책에 이탈되어지는 경우에 민심을 잃을 수 있음도 보여줍니다.
선거 가운데 민심이 모아지고 표를 얻는 중심의 이유는 리더들의 마인드입니다. 리더의 마인드가 정책으로 연결되어지고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대중들은 후보자들의 마인드를 알기 위하여 토론도 지켜보고 여러가지 정책도 살펴봅니다. 그런데 제일 위험한 것은 이중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결국 표를 얻기 위하여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고 정책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것은 진정성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번에 미국 대통령 후보자들의 마인드를 볼 경우에 두사람 보두 모호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표차이가 안나고 혼전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의 왕들이 계승되는 과정도 지금처럼 예측 불허의 혼전 양상을 겪고 때로는 피를 흘리는 혈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1대 왕이었던 사울은 2대 왕으로 지명을 받은 다윗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새왕으로 지명을 받은 어린 다윗을 제거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도 그리고 민심도 다윗의 편이었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왕의 자리에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결국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을 갖고 왕위를 주관하시되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새의 8명의 아들 중에서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은 그의 외모와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기준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다윗의 겸손함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인정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시기도 하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세우시고 사용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결론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결과이든 먼저 승복할 수 있는 마인드의 삶이 필요한 지금입니다.
폴 투르니에 라고 하는 정신학자는 인생을 사계절로 표현하고 ‘인생의 사계절’ 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인생의 시기를 계절로 보는 데 사람이 어떻게 어린 시절 봄에서 성숙해 지는 여름을 지난 열매를 맺는 가을을 보내고 죽음의 겨울을 맞이하는가를 글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올해 지금 우리는 시기적으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저물어가는 한해의 마지막 계절인 가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요즘 교회 마당의 이름 모르는 나무의 단풍을 보면서 묵상합니다. 그 나무의 단풍은 새벽에 보아도 아름답고 낮에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흐린 날에 보아도 아름답고 햇빛이 나면 단풍은 더 본연의 아름다운 색을 드러내어 더 아름답습니다. 언제 보아도 마음이 좋고 언제 보아도 또 보고 싶은 모습입니다. 그 단풍의 색이 만들어진 것은 여름의 모진 햇빛과 강한 비바람의 인고를 이겨낸 결과입니다. 결국 노년의 인생도 단풍의 아름다운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단풍의 교훈은 우리 인간에서 모든 젊은 시절 힘든 고난과 수고를 다 이기고 잘 익은 아름다운 인생의 노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가을은 더 성숙함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내 발에 밟히는 낙엽을 묵상하게 됩니다. 가을의 낙엽은 가장 고민이 되는 쓰레기입니다. 곱고 아름답던 단풍도 나무에서 볼 때에는 아름답지만 떨어지면 쓰레기 낙엽이 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단풍은 낙엽이 되고 쓰레기처럼 버려야 합니다. 여름의 초록의 싱그러움과 가을의 모든 오색의 단풍의 시절을 지내고 떨어지는 낙엽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이 순리이고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우리 인생도 낙엽처럼 쓸쓸히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할 때가 옵니다. 젊은 날의 그 열정도 아름답고 즐거웠던 모든 추억도 뒤로 하고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마무리 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가을의 때가 오고 낙엽같이 죽음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죽음의 때가 잘 준비되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가을의 때에 가장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 지금 단풍을 보면 즐거워할 수도 있지만 낙엽을 보면서 쓸쓸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마음과 삶 가운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어떤 정황에서도 즐거움의 삶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의 자세일 것입니다. 먼저 코로나시대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가을을 통해서 마음의 즐거움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코로나 시대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너무 여유가 없고 좁아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마음을 넓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하늘을 보고 단풍을 보면서 아름답게 깊어가는 가을을 즐기기를 원합니다. 코로나로 좁아진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가을을 오감으로 즐기면서 힐링을 경험하는 가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해마다 10월 31일은 루터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을 기념하여 지키는 종교개혁기념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로마의 카톨릭에 대항하여 라틴어로 된 ‘95개조 반박문’을 독일의 비텐베르크 수도원 벽에 붙이게 됩니다. 당시에 카톨릭의 부패함의 중심에는 면죄부 판매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카톨릭은 교황과 사제에 의하여 발부되는 면죄부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여 줄 수 있다고 하고 그것을 돈으로 팔았습니다. 당시에 사제들은 “ 동전이 상자 속에 땡그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건짐을 받는다” 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면죄부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헛되게 하는 거짓 교훈인 것을 루터는 알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루터의 반박문에 대하여 카톨릭의 태도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루터에게 탐나는 선물을 선사하여 루터를 굴복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루터를 위협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계속하여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루터가 위험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루터는 더욱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대로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외치게 됩니다.
어떻게 루터가 종교개혁의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는가? 루터는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전함에 도달하는 삶을 위한 오랜 갈등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카톨릭의 수도회에 속하여 많은 규율과 항목들을 지켰습니다. 특히 여러 날을 금식하였고 기도로 밤을 새웠고 자신을 채찍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혼의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는 노력할수록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카톨릭에서 세례를 받고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행성사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7성례의 모든 규례륵 잘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모든 일을 열심히 행하였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쫓아다닌 느낌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루터가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의 때문이었습니다. 루터는 성경 가운데 롬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과 의지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의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루터는 이 진리를 깨닫고 난 뒤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즉시 새롭게 태어나 낙원의 열려진 문을 통해 들어간 듯하다”.
모든 개혁의 중심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을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새롭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세상에서 말씀대로 세상을 개혁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와 타협하지 않고 항상 개혁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과 능력을 믿는 믿음의 양심은 죄를 이기고 담대하고 세상을 승리하게 합니다. 더욱 말씀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신앙의 개혁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