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는 해마다 5월 셋째 주일은 교회 창립 기념 주일로 기념하여 예배합니다. 특별한 행사는 없지만 예배 가운데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말씀을 통하여 기억하고 우리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새기는 기회를 갖습니다. 이민교회로서 우리 교회는 미국남침례교회의 정체성 위에 개척되어 지금까지 역사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를 통하여 많은 침례교회의 목사님들이 배출되었고 교회가 개척되도록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1970- 80년대 개척기의 뉴욕마하나임선교교회는 엘머스트의 미국교회당을 빌려서 당시 한국에서 온 많은 이민자들이 출석하는 숫적으로 성장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역사들의 기록을 보면 어린아이들의 숫자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이민교회로서는 큰 교회에 해당하는 교회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하는 어른들의 나이도 젊어서 30-40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부흥의 큰 잠재력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은 자체 건물의 부재로 인한 모임과 교육의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1990년 이후 20년 동안 우리 교회는 플러싱으로 교회당을 구입하여 이주를 하면서 전환기 시대를 맞이합니다. 새로운 건물에서 새로운 목회자와 더불어 우리 교회는 새로운 변화의 기회를 꿈꾸며 도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기만 해도 이민자들이 많이 오는 시기였고 교회의 청장년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 도약의 기회였습니다. 유초등부와  중고등부와 같은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어른들을 잘 양육하고 훈련하면서 전도와 선교에 집중해야 할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회 공동체가 리더쉽의 위기와 더불어 분열의 아픔을 겪으면서 어려움의 시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대 이후 우리 교회는 상처의 아픔을 딛고 재도약하는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비록 고난을 통한 아픔이 있었지만 다시 개척자의 심정으로 초심을 돌아가 교회를 세워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새로운 롱아일랜드 지역으로 우리 교회는 2016년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엘머스트 시대에서 플러싱 시대를 거쳐 이제는 롱아일랜드 시대를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롱아일랜드 이주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이주하려고 했던 교회 건물의 계약을 파기하게 하시고 우리로서는 계획하지 못했던 사요셋으로 이주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에서 지난 5년동안 우선 집중했던 일은 교회의 양육과 교육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교회학교의 교육 시스템을 갖추어 교회의 다음 세대를 키우고 아울러 지역을 위하여 썸머 캠프, 한국학교, 문화학교등을 통해서 섬겼습니다. 특히 올해는 제2교육관까지 수리를 마치고 새로운 교육 공간으로 준비가 되어서 더욱 좋은 섬김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 및 어른 세대도 치유와 양육과 훈련을 통하여 주님의 제자로 세우는 일에 그동안 집중하였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의 비전과 꿈은 더욱 주님 닮은 사람을 세우고 훈련하는 일뿐 아니라 평신도의 은사를 따라 더욱 다양한 사역들이 개발되고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과 더불어 세계를 향하여 더욱 사랑으로 선교하는 일에 교회가 드려지고 세워져가기를 기대합니다.

 

지금은 가정이 위기인 시대입니다. 현대의 가정은 마치 고쳐야 할 차들로 가득한 자동차 정비소와 같습니다. 많은 가정 안을 들여다보면 이혼의 문제, 자녀들의 탈선의 문제, 관계 단절의 문제, 상처와 고통의 문제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해법이 현실적으로 없기 때문에 문제가 그냥 방치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이 문제들로 인해서 더 문제가 악화되어 가정들이 해체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문제의 가정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성경 안에 그 해법이 있습니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시는 주인이십니다. 가정이 사람을 중심으로 세워가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으로 먼저 회복될 때에 가정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실 때에 가정을 축복하시고 가정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인이 된 가정은 결국 하나님의 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고 순종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보다도 말과 삶의 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의 부모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선택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가정에서 남자들이 먼저 제사장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먼저 말씀을 주시고 가정을 세우도록 부탁하셨습니다. 가정에서 남자들은 가정이 말씀으로 세워지도록 말씀을 가르쳐야 하고 말씀이 성취되기를 기도해야 하고 말씀으로 대화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자의 제사장 역할이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은 믿음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먼저 남자들은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영적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우선은 부모들이 지속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관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말씀과 기도로 함께 하나님과 관계하도록 초대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기도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는 인도를 받을 때에 가정은 회복되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서 가장 기쁨으로 경험하는 장소가 가정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은 영혼이 잘 됨 같이 육체와 범사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는 온전한 산 증거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은 내면의 기쁨 뿐 아니라 삶의 기쁨의 증거들로 함께 하심으로 증거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도구로 삼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으로 온전하게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은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고 삶을 가장 먼저 배우는 곳입니다. 특별히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가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가장 예민하고 어린 시기에 경험하는 가정은 좋은 것도 배우고 좋지 않는 것도 배우는 곳이 됩니다. 부모에 따라서 가정은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가정의 경험이 인생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고 오래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결국 남는 것은 학교의 추억보다도 가정의 추억이 더 선명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가정은 인생의 최고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인생의 방향을 배우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에게 정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방향의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나무가 방향을 위로 향하고 모든 꽂이 위를 향하여 꽃을 피우듯이 인생의 모든 공부도 일도 삶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에게 정하는 삶을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부모들은 몸을 하나님에게 방향을 정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은 시간을 하나님에게 방향을 정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은 돈을 하나님에게 방향을 정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인생의 방향을 배운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은 인생의 가치를 배우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을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가정에서 이기적인 삶을 내려놓고 이웃과 서로 관계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삶이 가치 있는 것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삶으로 바른 가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가치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의 삶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인생의 바른 가치를 바르게 배운 자녀들은 결국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정은 가치 있는 삶을 몸으로 체험하며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인생의 자세를 배우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자세의 싸움입니다. 자세의 기본기가 훈련되는 곳은 가정입니다. 부모는 바른 자세의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세를 어려서부터 잘 훈련 받은 아이는 결국 삶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먼저 가정에서 마음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서 마음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가장 배워야 할 자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부모는 건강한 자기 이해의 자세를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배운 자세가 자녀의 평생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주인으로 삼은 가정 학교가 되면 가정은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먼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방향과 자세와 가치를 배우는 가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결혼 후 가장 오랜 시간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1학년 때에 아내와 결혼을 하고 올해 5월이면 벌써 31주년이 됩니다. 결혼하던 때가 어제같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데 벌써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항상 옆에서 챙겨주던 아내가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을 경험합니다. 관심밖에 여기던 것들도 새로 관심을 갖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홀로 지내는 시간을 갖으면서 홀로서기의 삶을 잘 연습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인생은 언젠가는 홀로 남게 됩니다. 혼자 밥을 먹어야 하고 혼자 잠을 자야 하고 혼자 걷기도 해야 합니다. 결국 혼자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홀로서기가 연습이 안되면 삶이 지옥같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홀로서기가 불편하다면 더 이상 삶은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 서기가 잘 준비된 사람은 더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교회와 함께 홀로 서는 삶을 잘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홀로 서기의 삶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을 의지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 자꾸 우리는 스스로 해내는 습관보다는 자꾸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나의 경우에도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아내에게 너무 의지하는 삶을 많이 살아왔습니다.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에 익숙하였지 내가 스스로 식사를 만들어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아내가 챙겨주는 와이셔츠를 입고 아내가 빨아준 속옷을 입는 것에 익숙하였습니다. 이제는 점점 더 의지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해결하는 연습을 많이 연습 중에 있습니다.

둘, 홀로서기를 위해서는 게으름을 버리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인생의 과정가운데 사소한 것은 없습니다.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은 누군가의 수고와 땀의 댓가입니다. 집안의 먼지를 청소하고 밀렷던 빨래를 청소기에 돌리고 건조해서 정리하는 일들은 사소하게 보여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이 홀로 사는 삶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일상입니다. 홀로서기를 잘 하려면 사소하게 여기는 일상의 일들을 부지런하게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편함의 자유함을 내려놓고 조금 더 몸을 움직이고 수고하면서 삶을 준비하는 수고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홀로 서기가 잘 되려면 더욱 부지런하게 삶을 살아내는 수고의 댓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셋, 그리스도인의 홀로 서기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하나님과 깊은 풍성한 교제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외로울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더 풍성하고 자유한 기회가 되도록 주님과의 만남의 교제를 잘 갖아야 합니다. 만일에 홀로 되었을때에 주님없이 홀로서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삶은 너무 외롭고 삭막할 것입니다. 특히 노년에 홀로 되었을 때에 주님은 최고의 친구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교회는 최고의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하는 곳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점점 다가오는 인생 가운데 홀로 서기의 삶이 잘 준비되어져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고민은 성경 말씀의 적용에 대한 문제입니다. 설교를 듣고 적용을 고민합니다. 날마다 묵상을 하면서 적용을 고민합니다. 제자훈련을 하면서도 적용에 대하여 부담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적용에 대한 고민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스스로의 부족함을 잘 알기에 적용에 대해서 마음에 소원함을 갖지만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른 적용이 될 때에 참된 변화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적용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적용을 소개하는 성경의 단어는 행함 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적용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용하기 원하는 명령과 교훈과 뜻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용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이르는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풍성한 삶을 기대하십니다.

바른 적용을 위해서는 바른 마음의 동기로 성경을 묵상하거나 들어야 합니다. 반대로 바르지 못한 동기로 성경을 대할 때에 우리는 바른 적용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대개 묵상이나 설교가 잘 적용이 안되는 경우에는 잘못된 마음의 자세가 있습니다. 우선 집착입니다. 자기의 소원과 욕구에 집착이 된 사람은 성경을 대할 때에 자신의 왜곡된 동기가 우선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 성경 본문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음 합리화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의 문제를 덮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그런 말씀을 통한 바른 적용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동일시의 문제입니다. 자신을 성경의 인물과 동일시여기면서 자기 중심적인 잘못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바른 적용을 위해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관점에서부터 종합적으로 잘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자신을 가정, 직장,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충분히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지 않고서는 나의 문제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나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 안의 나를 잘 살펴볼 때에 우리는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주님의 관점에서 나를 더욱 바라보면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른 적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명의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난 뒤에 성령님으로 인하여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 결과 그들은 가던 길의 방향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적용을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적용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바른 적용의 삶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적용하도록 능력도 주십니다. 결국은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바른 적용이 가능합니다. 말씀을 성령님으로 인하여 바르게 적용하는 곳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아내가 한국을 가면서 숙제를 하나 내고 갔습니다. 가꾸던 화초들을 죽이지 말고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창가 햇빛이 드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분의 이름 모를 화초와 꽃들을 돌보는 일은 이제까지 아내의 몫으로만 여겼던 일이었습니다. 화초를 돌보는 일은 크게 수고롭게 해야 할 일은 없지만 마음을 다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선 때를 따라 물을 잘 주어야 합니다. 적당히 햇빛이 들 수 있도록 커튼을 열어서 햇빛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창문을 열고 바람이 들어오도록 환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가끔 잎사귀에 묻어있는 먼지도 닦아주기도 해야 합니다. 이제 3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하나도 죽지 않은 것을 보면 마음을 다해서 숙제를 잘 감당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화분에 돌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조화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잎들의 먼지를 닦아주다가 조화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부터는 물도 주지 않고 더이상 마음을 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화초들은 마음을 다해서 관심과 정성을 쏱아야 하지만 조화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조화가 보기에는 더 화려해도 살아있는 생화만큼 마음을 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들인 것들이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결국입니다. 비록 작은 화초와 꽃일지라도 마음을 다할 때에 더 아름다운  관계가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은 관계를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곳에 마음은 가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서 시간을 내어주고 정성을 쏱는 곳에 마음은 더 집중하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음을 다해서 관계를 하는 사람에게 더 집중이 됩니다. 마음을 다해서 관계를 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 삶이 풍성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인조 꽃처럼 마음을 다하지 못하고 그냥 형식적인 관계를 하면서 웃고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이상 마음이 가지 않게 됩니다. 마음을 꾸미지 않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솔직하고 진실하게 다가가면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이어지는 관계를 할때에 우리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가장 관계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보십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할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에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에 감동은 마치 조와를 대할 때와 생화를 볼 때처럼 다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는 조화라고 하여도 거기에는 냄새도 없고 생명의 신비의 감동이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는 형식적인 관계는 관계의 진전도 어렵고 감동도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관계할 때에 결국 살아있는 생명의 놀라운 신비와 기쁨을 경험합니다. 마음으로 이어지는 삶은 풍성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부활절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어려움 가운데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부활절과 비교하여 올해는 더 감사할 것들이 풍성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대면으로 함께 에배하고 교제하는 시간이 되어서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예배 가운데 침례식을 갖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간 가운데 침례식과 같은 시간은 일생의 특별한 시간입니다. 침례는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에 대하여 살게 됨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특히 물에 침례하는 순간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선언이며 물에서 나오게 될 때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됨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건너는 사건과 유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가운데로 들어간 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홍해 가운데서 인도하시고 마침내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침례의 의미와 유사합니다. 이제 침례는 주와 함께 새생명을 얻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삶을 사실 때에 침례 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죄없으신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들을 위하여 구원자로서 공적인 메시야 사역을 위한 선포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에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선포하고 성령 하나님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침례의 시간이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인 시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침례식과 같은 영적 시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함께 하시는 영광의 시간입니다. 그 결과 모든 영광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올려지고 되고 모든 것들이 삼위하나님으로부터 온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 가정의 아기가 모든 가정의 응원과 축복 속에 때가 되어짐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이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때가 됨으로 이루어지는 언약의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상 교회의 사명으로 땅끝까지 가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침례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일이요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서 세워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점점 교회에서 침례를 받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주님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불신자들이 전도가 안되고 젊은 자녀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의 가장 과제는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이요 불신자를 주님의 제자로 삼는 일일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 순종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힘든 시간 속에서도 침례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생명이 태어나는 부활절의 기쁨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맞이하신 기간을 기억하면서 교회들은 고난 주간을 정하여 기념합니다. 사실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은 매일 매일이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고난 주간을 정하여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시간을 묵상할 때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주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준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때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십자가를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몸부림치는 간절한 땀방울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피곤한 가운데서도 몸을 쳐서 복종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심으로 고난을 결국 맞이하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고난을 이기는 준비는 기도에서 출발합니다. 무엇보다도 몸을 쳐서 복종하며 몸부림치는 기도를 통해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하며 죄를 털어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온전한 기도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기도 없이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해 인내하셨습니다. 우선 3년동안 함께 하였던 제자들의 실망스러움을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제자들의 모습 앞에서 묵묵히 인내하심으로 고난의 길을 홀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환경에 대해서 인내하셨습니다. 공정한 법의 원칙을 어기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인내하셨습니다. 무지하고 어리석게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인내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인내함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인내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인내함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인내의 거룩한 모델이십니다. 인내 없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인내를 또한 믿음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환경도 예수님 때문에 인내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 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순종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칼의 힘으로 그 길을 돕는다고 할 때에 주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힘을 오직 순종하는 것에 사용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순종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자기를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든 권세와 지위와 능력을 내려놓고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앞에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려놓음으로 온전한 순종을 보여주셨습니다.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진정한 능력은 순종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능력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순종하는 능력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능력입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고난의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가운데에서 주님의 영성을 경험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 침례교 지방회 월례회의를 하면서 올해의 지방회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을 했습니다. 해마다 연합으로 했던 청소년수련회 그리고 목회자수양회와 같은 행사들을 지난 해에 이어서 올해도 취소하고 축소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1년의 코로나시대를 겪으면서 지방회 교회들 가운데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2개 교회가 문을 닫았고 여러 개의 교회들이 심각한 운영난을 겪고 있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교회들도 대부분 극심한 침체를 겪는 것을 보게 됩니다.코로나 시대의 교회들은 점점 인원들이 감소하고 재정도 줄어들면서 외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코로나시대의 교회는 내적으로 더욱 기본에 집중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선, 코로나 시대의 교회는 더욱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기본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예배와 기도는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몇 명이 모이는가 숫자도 넘어서야 합니다. 코로나시대를 겪으면서 1명이 참가하는 대면 예배와 기도회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코로나시대를 겪으면서 진짜 신앙의 진정성을 테스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진정한 교회는 진정한 예배와 기도로 승부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예배와 기도에 게을러지고 포기하는 경우에는 결국 망하는 교회의 지름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대에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일을 더욱 복종해야 합니다.

둘째, 코로나 시대의 교회는 관계가 멀어지지 않도록 영적 교제의 기본을 순종해야 합니다. “안보면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마음을 연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의 목장 식구들끼리 더욱 나눔과 섬김이 필요합니다.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마음을 열고 서로를 영접해야 합니다. 코로나시대를 당하면서 더욱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분들도 생기고 심지어는 교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분들은 기다려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코로나를 겪으면서 실직을 하고 환경적인 변화로 인해서 영적 침체를 겪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서로 기도하여 주면서 어떤 경우에는 커피 한잔의 나눔 그리고 따뜻한 한끼의 식사 교제가 힘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의 교회가운데 더욱 필요한 것은 마음을 이어주는 따뜻한 섬김입니다.

셋째, 코로나 시대의 교회는 어려운 가운데서 더욱 평신도 사역자들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지난 1년간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 우리 교회는 평신도들의 귀한 헌신들이 있었습니다. 예배와 방송과 교육 그리고 청소와 같은 일들을 헌신하는 평신도 일꾼들로 인해서 교회로서의 공적인 기능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섬김의 헌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위험과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헌신을 감당하는 것은 자신도 살고 공동체도 살면서 선한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일수록 평신도들의 헌신적인 열정이 교회를 살리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시대의 교회는 더욱 영적인 기본기에 더욱 충실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가 코로나의 부정적인 환경과 시간에 타협하지 말고 더욱 주님의 교회로서 건강하게 승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죽었던 것 같은 땅 가운데서 새싹들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어김없이 봄이 오면 땅은 다시 회복되어 생명의 기운을 발하는 신비를 봅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자연은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죽은 것같은 땅은 회복되고 새생명의 싹들이 솟아나곤 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간 속에서 주기적으로 회복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자연은 시간 속에 정화되고 회복되는 능력이 있지만 인간의 마음은 우리들의 책임이 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마음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역할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도 예민하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다양하고 복잡하고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잘 다루어야 합니다. 특히 상처있는 마음은 잘 치유되어져야 합니다. 만일에 마음이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으면 그 상처난 마음은 상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상처난 마음은 겨울의 인생을 살게 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입니다. 상처받는 관계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사랑이 기대가 큰 만큼 아픔도 큽니다. 그러나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그 상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관계의 상처는 분노와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날카로운 활에 화살을 장착하고 공격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또 어떤 이는 갑옷을 입고 항상 방어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결국 상처받은 마음은 부정적인 정서로 말미암아 관계를 하기에 어렵게 합니다.

마음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인간의 책임은 오직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를 준 모든 원수같은 자들을 십자가에서 용서하여 주시고 모든 상처를 해결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누가 그 십자가를 통해서 치유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약은 반드시 먹고 바르고 체험해야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능력은 내마음으로 믿고 내 마음 안에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새마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나의 마음은 죽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나의 상처의 마음을 간데없고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새롭게 됩니다.

새봄이 오면 만물이 새롭게 회복이 됩니다. 우리 마음의 봄은 십자가로 회복이 됩니다. 새봄을 맞이하여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로 새마음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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