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는 지난 3년 전에 성경 전권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 경우에 성경 전권을 한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적으로 하루 1장을 쓰는 것으로 계산해서 1189장을 마치기까지 3년을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에 결국 성경 전권을 다 필사하는 것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낙오자도 있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성경 전권 필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처음 성경 필사를 시작하던 때가 어제같은데 벌써 3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를 잘 하신 분들을 보면 그 끈기와 수고가 너무도 크다고 느꼈습니다.
이번에 성경 필사를 다하신 분들을 보면 대부분 나이가 드신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젊은 분들보다 더 시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은 시간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인생을 살고 더 믿음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성경을 가까이하고 싶은 믿음의 소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점점 더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알면 알수록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하고 싶은 매력에 끌립니다. 성경 필사를 하신 분들의 마음을 나누는 기회를 들어보면 매일 매일 성경을 쓰면서 받고 느끼고 경험한 은혜들이 너무도 크고 놀라웠습니다. 성경 쓰기를 통하여 마음 가운데 더욱 말씀의 은혜를 풍성하게 체험하게 된 기회가 되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쓰기를 통하여 매일 자기를 훈련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쓰기를 위한 시간의 우선순위를 두는 삶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정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매일 꾸준히 지켜야 하는 영적 목표가 있어서 매일 매일의 삶이 의미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매일 꾸준히 성경 전권을 마침내 다 쓰고 나서 자신의 소중한 영적 유물이 되는 경험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그 자녀들이 한자 한자 적은 성경을 보면서 가정과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소중한 영적 자산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3년 동안 힘들고 어려운 정황에서도 자기를 쳐서 복종하여 성경쓰기를 잘 감당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실 말을 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를 잘 하시는 분들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교회적으로 믿음의 좋은 본을 보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성경쓰기를 통하여 깨닫고 받은 그 은혜가 개인적으로 잘 적용되어져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을 더욱 누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앞으로 교회적으로 더욱 바라는 것은 영적인 진보와 성장을 위해서 더욱 개인적으로 잘 도전하고 적용하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세상은 메타버스의 시대입니다. 메타버스란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등 미디어에 담긴 새로운 세상 디지털화 된 지구를 메타버스라고 합니다. 메타버스는 초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와 세계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의 합성어입니다. 현실을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메타버스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페이스 북, 카카오톡, 인스타그램에 우리의 글을 올리는 것,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서 사진을 올리고 회원이 되는 것 그리고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는 것이 모두가 다 메타버스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메타버스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젠 나를 아이디로 표현하고 나를 대신하는 캐릭터의 아바타가 활동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나의 마음의 진실과 관계없이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멋있게 꾸미기도 하고 화려하고 나를 표현하면서 자유자재로 세상에서 온라인으로 개성을 표현합니다. 자신이 만든 아바타로 쇼셜미디어의 아름다운 주인공으로 자신을 만들어 선전하면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곤 합니다. 화려한 기술들을 이용하여 최대한 멋있고 능력있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상의 세계에 올리면 얼마든지 능력있는 사람으로 선전이 되곤 합니다.
메타버스를 이용하는 기독교는 일단 이 모든 것들을 좋은 선교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온라인 가운데 교회를 세상에 알리곤 합니다. 또 교회마다 카톡을 만들어서 공유하여 정보와 교제를 나누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을 통해서 예배를 공유하고 설교와 간증과 세미나를 공유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교회는 메타버스를 선교적인 도구로 잘 사용하여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메타버스의 진화와 발달을 무시하지 말고 잘 따라서 교회 가운데 선용하는 것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타버스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메타버스는 단순히 그릇과 같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하도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메타버스의 도구를 이용하여 복음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복음은 단순한 정보의 나눔이거나 지식의 나눔이 아닌 온전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할 때에 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타버스를 통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로 삼아야 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더욱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성이 되어야 합니다. 가상의 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진정한 마음과 삶을 나누는 경험을 갖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점점 메타버스에 익숙하게 될 때에 영혼 없는 아바타 같은 영성이 되어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주님을 더욱 닮아가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타버스가 점점 오고 있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더욱 마음과 몸을 다하는 체험적인 영성이 필요합니다.
올해 고난 주간은 더욱 십자가의 의미가 크게 마음에 와 닿는 시간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고난을 넘어서 지금 우크라이나의 전쟁의 고난을 지켜보면서 점점 세상의 죄악의 심각한 한계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초과학 문명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여전히 과거 이상으로 인간의 죄악의 실상은 더해진 모습입니다. 전혀 죄의식 없이 미사일 버튼을 누르고 총을 쏘면서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전쟁의 실상을 보면서 차오르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곤 해서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습니다.
과연 고난의 전쟁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이미 예수님은 고난의 시대에 오셔서 고난을 담당하시고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담당하셨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 죄를 담당하신 범위 안에는 과거 나찌에 속한 사람이나 지금 양심에 화인맞은 채로 전쟁하는 러시아 군인이나 푸틴 같은 사람에게도 적용이 될까 질문하게 됩니다. 이미 성경 속에서 역사 속에서 가장 반복되는 질문은 악인들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의 용서의 적용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적용의 대상이 원수까지도 제한없이 차별없이 적용하기를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용량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서 더 낫다 더 옳다라고 생각하는 자기의와 자기만족들이 우리에게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적용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은 죄인이요 원수같은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서 남과 나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와 자랑을 공로로 스스로를 옳다 여기며 자랑하는 나의 의는 부질없는 행위입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임으로 자기 공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전쟁을 보면서 일어나는 모든 자기 감정과 생각조차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자비와 긍휼을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화인맞은 양심으로 악을 행하는 악한 삶을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의 대속의 십자가를 담당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된 우리에게는 대속의 고난의 십자가를 담당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대속의 고난을 담당하는 것은 주님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수같은 사람들을 품고 미움을 버리고 용서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미움과 정죄의 마음을 버리고 더욱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용서하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가정에서 한 아기가 태어나 성인이 되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생의 주기입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가정의 부모와 같은 어른의 최선의 도움이 요구됩니다. 먹는 것, 옷을 입는 것, 걷는 것, 말하는 것 등의 생활에서부터 모든 교육에 이르기까지 한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어른들의 엄청난 인내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어린시절 어른과 가정의 도움을 잘 받은 아이는 결국 잘 자라서 성인이 되면 가정과 이웃을 위하여 섬기는 귀한 일꾼이 됩니다. 가정의 한 어린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인으로 잘 자라는 것이 결국 가정을 세우고 세상 나라를 세우는 힘이 됩니다.
우리 신앙도 어린아이의 신앙의 단계를 지나서 반드시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하지 않고 어린아이의 신앙의 상태로 정체되는 경우에 심각한 관계의 문제를 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신앙을 갖은 사람은 육신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세울 수 없습니다. 성경의 고린도교회는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교회 공동체가 심각한 문제를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따라 분쟁하는 문제, 교회 질서가 깨지는 문제, 음행과 같은 윤리적인 문제, 우상숭배같은 믿음의 문제등 다양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을 갖은 사람은 분별력이 없고, 절제가 없고, 덕이 없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은 어른의 신앙으로 변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어른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이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젖을 끓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젖만 먹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각을 사용하여 굳고 딱딱한 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에 어른의 신앙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어른의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과 생각이 자라야 가능합니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안에 마음과 생각이 먼저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물론 장성한 분량의 마음과 생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자기를 쳐서 말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어른의 신앙으로 세워진 사람의 가장 외적인 행위는 철저히 자기 중심보다는 공동체를 세우는 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어른 신앙을 갖은 사람은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나보다 남과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덕이 있습니다. 어른의 신앙을 갖은 사람은 자기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낮은 곳으로 더 고난을 받으면서 자기를 쳐서 복종하면서 성령님을 따라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그 결과 어른의 신앙의 사람이 있는 곳에는 성령님의 인격적인 열매를 통한 아름다운 향기가 나타나고 연약한 사람들이 세워지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먼저 각 사람이 주님의 장성한 어른의 신앙으로 세워지는 일들이 더해짐으로 결국은 교회공동체도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한국 사회가 MZ세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MZ 세대의 나이는 20대 30대의 젊은 세대로서 1981년-2010년 에 출생한 세대입니다. 이 나이대의 청년들은 아직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대학교를 졸업하거나 직장을 찾거나 직장 생활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번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들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들이 한국 인국의 약 44%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으로는 그들의 숫자가 더해지는데 비해 교회에서는 청년들의 인구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민교회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합니다. 점점 교회 가운데 20대-30대의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고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적으로도 가장 취약한 세대가 20대인 것을 보게 됩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미국 바나 그룹에서 4년동안 18-29세까지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6가지 이유를 정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깊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대부분 청년 시대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를 보면 성경중심적인 바른 믿음보다는 도덕적이고 심리 치료적인 형식적인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지 못하고 깊이 있는 믿음을 경험하지 못한 채 얄팍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청년들을 봉사의 자리에서 봉사하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다음 세대 청년들에게 더 깊이 있는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도록 준비하고 전달 할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청년 세대들에게 함께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르고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청년 세대들이 교회에서 가장 힘들어하고 거부감을 갖는 것이 바로 비본질적인 모습으로 기성 세대들이 교회에서 분쟁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과 어른들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그 모습대로 아름답고 바르고 건전한 교회를 세워가야 하는데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에 실망하게 됩니다. 어느 날 큰 딸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다투고 분쟁하는 모습을 듣고 교회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왔습니다. 다음 세대인 청년 세대들에게 우리의 신앙과 삶이 둘이 아닌 하나의 모습을 삶의 현장에서 관계의 현장에서 보여주는 것이 영향력의 길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으로 부족하고 어려움이 많을 수 있지만 더욱 힘써야 할 우리 교회의 기성 세대의 과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청년 세대들에게 더욱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열린 마음으로 저들을 수용해주고 인정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아직 20-30대는 분명히 경험도 적은 나이입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에 원하는 가치가 높고 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그들의 다양성과 열정을 인정하고 함께 수용해 주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기도해야 할 부분은 MZ 세대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20-30대를 판단하기 보다 잘 환영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교회적으로 20-30대의 소리를 함께 공감하고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잘 전함으로 더욱 깊이 있는 믿음으로 자라가는 교회로 세워 가기를 원합니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3월이지만 봄이 어느덧 우리 곁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교회 앞 정원에는 얼었던 땅을 비집고 예쁜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느덧 잔디들도 녹색 잎을 내밀면서 봄이 오는 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새벽기도를 위하여 집 대문을 열면 코 끝에 부딪히는 봄기운의 바람이 봄을 느끼게 합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지만 유난히 올해 봄은 특별함을 느낍니다. 지난 2년여 동안 극성스러운 코로나바이러스로 봄을 잊어 버렸는데 올해는 일상의 따뜻한 봄이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신비한 축복임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그 귀중한 인간의 생명들이 너무도 안타깝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갑자기 아파트에 날아온 포탄으로 사랑하던 가족들이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가 되기도 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안고 극장으로 피신하여 자유를 희망했던 많은 사람들이 날아든 포탄 한 발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생명을 멈추는 안타까운 뉴스를 듣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나에게 허락한 생명을 소중하게 귀하게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일상의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누리고 삶을 살아가는 자유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전쟁을 겪으면서 잃어버린 일상의 자유를 가장 소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유, 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먹는 자유, 자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자유, 티비를 보고 웃고 즐거워하는 자유,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는 자유, 사람들과 자유롭게 전화를 거는 자유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자유입니다. 삶의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아마도 가장 절실한 기도가 자유의 회복일 것입니다. 올 봄에는 조그마한 자유 조차도 더 소중하게 더 귀중하게 친구가 되어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회복하는 영적 회복의 기쁨이 경험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동안 코비드의 두려움 속에 제한되었던 우리의 마음 그리고 믿음들도 새로운 회복이 필요합니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처럼 말랐던 우리의 심령들이 군대처럼 힘을 얻고 왕성하게 부흥되어져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만이 따스한 봄기운처럼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울 수 있고 맑은 샘물같이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영혼 가운데 새봄의 능력을 통하여 가장 의미있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 선거 중에서 가장 박빙의 승부였습니다. 초반에는 여당 후보가 앞서다가 역전을 당하고 결국 야당후보가 약 0.7% 정도의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번 선거를 치루는 동안 나의 주변의 목사님들도 각각 지지하는 후보와 상대방 후보를 놓고 열띤 입씨름을 벌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후보 지지와 관련된 자기의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비판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번 한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서 분명한 것은 여전히 지금까지 극복하지 못한 지역 구도의 벽이 너무도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한국 교회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한계를 보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뱀같은 지혜입니다. 세상에서 정치적인 헤게모니 싸움을 하는 정치인에 대해서 건전한 판단력을 갖아야 합니다. 만일에 무조건 맹목적인 굴종을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일일 것입니다. 한국은 교회조차도 우파와 좌파의 이데올로기 진영 논리에 빠져서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인 맹신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신의 지역에 따라서 무조건 그 지역이 지지하는 후보를 따라 지지하곤 합니다. 교회는 지역보다도 진영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우선해서 판단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판단을 따라 교회가 움직이면 교회는 결국 부패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뜨거운 밀당의 관계였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교회는 정치적이었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 기독교는 세상 나라의 정치에 이용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부패하게 되고 형식적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세시대가 되면서 천 년여(500년-1500년)의 기간 동안 교회는 더욱 세상 나라의 정치적인 영향 아래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의 힘은 세상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습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교회는 영적인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정치와 종교는 철저하게 분리하여 접근하였습니다.
항상 교회는 세상 정치에 대해서 선지자적인 눈과 입술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세상 나라와 정치를 위하여 냉정함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정치를 하는 경우에는 선지자적인 소리를 내야 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동성애를 허용하고 법으로 제정할 때에 성경적인 교회들은 분명하게 반대의 소리를 냈습니다. 교회의 예배를 제한하거나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 정치에 대한 저항과 반대를 할 때에 단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하여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세상 가운데 선지자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은 너무도 심각합니다. 군인들 뿐 아니라 민간인 피해가 전쟁이 일어난 이후 8일이 지난 시간 까지만 해도 민간인 사망자만 2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안타까운 소식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떠나 피난을 떠난 피난민의 숫자도 벌써 100만명이 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을 통해 졸지에 죽음을 맞이하고 피난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보면서 과연 어떻게 현실의 역사를 이해해야 할까요?
전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도 많은 전쟁이 소개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앗수르 군대로부터 바벨론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고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당하였던 전쟁의 결과도 지금의 전쟁과 다를 바 없이 많은 사망과 피난민과 포로를 낳게 됩니다. 3차에 걸쳐서 유다는 바벨론에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됩니다. 특히 유다의 시드기야 왕은 목전에서 그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두 눈을 빼고 사슬에 결박하여 바벨론에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옥에 갇혔습니다. 당시에 유다의 전쟁의 고난과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의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이 의인을 공격하여 정의가 굽어지는 현실의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시는 우선적인 메시지는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지금 하나님이 당장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한 때까지 기다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하십니다. 합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불의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먼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먼저 살 것을 기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의 한 세상에서 오직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합2: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 함이라”.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을 결국 나타내십니다. 세상의 주권자 되시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안목으로는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면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하여 공의로서 통치하시는 뜻들이 분명하게 보여지기를 소원합니다. 결국 이번 전쟁을 통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와 같은 악한 사상들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뿌리 뽑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요즘 한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세전이 한창입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적격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흠집을 찾아내어 공격하면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제한적인 뉴스와 같은 정보를 통해서 결국 누군가를 리더로 결정하고 투표해야 합니다. 리더를 결정할 때에 한국의 경우에는 학교, 지역과 같은 정을 근거로 하여 감정적으로 결정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기준으로 리더들을 선택해야 하는가? 고민과 갈등이 생기곤 합니다. 최소한 바람직한 리더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리더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흠이 없는 인격입니다. 물론 사람은 다 부족하고 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더로서 최대한 공인으로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자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이나 다윗을 리더로 세울 때에 우선 보신 것이 그 마음의 자세였습니다. 요셉이나 다니엘같이 세상에서 리더로서 귀하게 사용되었던 자들을 보면 대부분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리더를 뽑을 때에 할 수만 있다면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자는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리더의 합당한 조건은 능력입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의 리더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 믿음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에서 리더로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일에 대한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대통령과 같은 리더의 위치에서는 세부적인 것들을 다 알 필요는 없지만 숲을 보는 큰 안목과 더불어 나무를 보는 작은 안목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인 식견과 경험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리더는 리더로서 적당한 현장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려움과 고난의 현장에서 단련된 능력으로 무장된 사람이라면 리더의 자리에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리더는 바른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리더는 현실도 보아야 하지만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리더가 미래를 보는 눈이 없다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비전이 있다면 바른 미래의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요셉은 바른 비전으로 위기에 처한 한 나라를 구해내는 도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바른 비전의 리더들은 비전의 정책과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준비의 자세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비전 대신 야망을 갖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비전의 리더들은 모든 사람들을 살리고 유익하게 결과를 갖게 합니다.
2022 동계올림픽에서는 그 어떤 올립픽보다 선수들의 실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번의 실수로 수년동안 노력했던 수고가 허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1등으로 달리다 마지막 순간에 실수하여 다 잡은 금메달을 아쉽게 놓치기도 하였습니다. 4년동안 땀과 노력을 다했는데 순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허사가 될 때 그 충격은 너무도 크고 오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고 빨리 그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실수를 잘 받아들일 때에 남은 인생에 더 큰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 새벽기도회 시간에 흔하지 않은 실수를 하였습니다. 화요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월요일 성경 본문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요일을 확인을 하지 못하였는지 지금도 이상할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 머리에는 화요일 본문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입력이 된 것입니다. 더 확인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그러나 실수할 수 있는 자신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실수를 통해서 더욱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30대 시절에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이 완전주의입니다. 내 스스로 실수하지 않고 모든 것에 완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정해놓은 목표에 항상 모든 것이 채워져야 하고 그 결과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 모든 것에 대해서 낙심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사역이 항상 일중심이 되어서 외적인 목표를 향해서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간 뒤였습니다. 내 생각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내 사역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연약함을 치유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이 없습니다. 내가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연약하여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내가 실수하였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조건을 따라 주지 않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더욱 경험하게 됨을 경험합니다.
실수의 연약함은 자신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실수를 통해서 더욱 자신을 돌아보는 은혜의 기회가 됩니다. 모든 것이 여전히 집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때로 오랜 시간 익숙함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과신의 결과이기도 합니다.실수를 통해서 자신을 믿지 않고 더욱 주님을 믿음으로 자신을 세워가는 연단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채워짐으로 누리기도 하지만 모자람을 채움으로 얻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실수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