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반환점 6월입니다. 한 해 반환점에 설 때에 두 마음이 일어납니다. 지난 6개월 동안의 삶을 살면서 아쉬운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남은 6개월의 삶을 기대하는 마음도 일어납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잘 살고 싶은 기대감이 큽니다. 그러나 기대감이 클수록 아쉬움은 더 커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같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지난 6개월 동안 잘 버티고 살아온 것을 보면 우리 자신을 향해서 “잘 했어” 라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또 한편으로 남은 한해의 시간들을 위해서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질문들이 있습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질문이 필요합니다. 이 질문은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너무도 쉬운 질문입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다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나이지만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반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리시고 생각하면서 사셨습니다. 특히 성경의 바울은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 반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소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반복하는 삶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반복해서 질문하는 것은 나의 삶을 다시 확인하고 지켜가기 위함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에게 물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 생각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둘째, 왜 내가 사는가? 질문이 필요합니다. 이 질문은 나의 삶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점점 시간이 흐르고 죽음은 우리 앞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우리는 충분히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궁극적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왜 사는가? 이유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하루를 살아도 그 이유를 위하여 의미있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이유가 없는 사람은 살아갈수록 허무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힘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이 주신 삶의 이유에 대한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삶이 의미가 있고 행복할 것입니다.
셋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삶의 지혜를 고민하는 질문입니다. 누구든지 삶을 사는 나름의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가장 잘 사는 인생의 길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삶의 기준에서 돈을 잘 버는 인생, 명예와 권세를 얻는 인생을 살기 위한 사람의 지혜의 답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인생이라면 하나님의 기준에서 인생을 잘 사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인생의 중년기를 지나고 인생 후반전을 살 때에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있으면 후회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질문에 오직 바르게 답을 할 수 있는 분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주신 답을 알고 살아가는 후회 없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한국의 축구선수 손흥민의 인기가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세계축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프로 리그에서 23골을 기록하여 올해의 최고 점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이것은 아시안 선수로는 최초의 수상이라고 합니다. 특히 그의 수상은 페널틱 킥이 없는 그라운드에서 순전히 넣은 골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오른발과 왼발을 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서 그가 기록한 골은 양 발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특히 그가 기록한 23번째 골은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성공률이 낮은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발로 감아서 떨어지게 하는 골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든 축구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손흥민의 성공은 기본기가 잘 훈련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손흥민은 어린시절 그의 아버지로부터 축구 개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손흥민의 아버지는 그에게 기본기를 반복하여 충분히 훈련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은 체력의 기본기를 충분히 훈련하였고 어떤 기술은 그것을 매일 반복하여 훈련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의 손흥민은 피나는 훈련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어린 손흥민 선수에게 기본기 훈련에 집중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아픈 기억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축구 선수였지만 결국 부상을 당해서 일찍 선수의 꿈을 접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축구 선수의 길을 가는 어린 아들이 부상을 당하지 않고 성공하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 먼저 기본기를 충분히 훈련하는 것이 곧 성공의 길이라고 보고 그렇게 적용을 한 것입니다.
기본기의 중요성은 운동뿐 아니라 공부도 신앙도 똑같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기가 먼저 잘 훈련되어야 합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신앙의 기본기를 잘 훈련할수록 결국 신앙 생활을 잘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나이가 들어서 신앙 생활을 할 때에도 신앙의 기본을 잘 훈련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의 신앙은 그 기본기가 잘 훈련되면 승리의 능력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말씀을 온전히 믿음으로 놀라운 영적 능력을 내 몸을 통해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본기를 다시 점검하고 다시 무장하고 훈련하면서 나를 세워가는 삶을 통해서 인생에서 주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부로서 유명했던 어거스틴은 유명한 책 ‘고백록’에서 어머니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어거스틴은 젊은 날 오랜 기간 심한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타락한 아들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였고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타락에서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기독교의 유명한 교부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인생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의 교사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가정에서 최대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부모야 말로 최고의 영향을 미치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어린시절부터 잘 도울 수 있도록 잘 준비된 부모는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먼저 자녀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영적 멘토가 되어야합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영적인 부분들이 필요를 채우고 훈련받는 것은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미치는 부분입니다. 특히 어린시절 죄의 의지가 자라기 이전에 믿음의 의지가 자라도록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선경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린시절 조기교육을 강조해서 어린 시절 언어교육 악기교육 체육교육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배운 것이 평생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 가정에서 어린 시절 영적인 필요들이 잘 채울 수 있는 영성 있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기질과 개성을 잘 살펴서 인정하고 돕는 카운슬러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각각 다르고 독특하게 태어났습니다. 가정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기질대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적극적인 아이들은 자기를 잘 표현합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아이들은 자기를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보통 외성적인 성격의 아이들은 처음에 시작은 잘 하지만 마무리가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하는 것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내성적인 소극적인 아이들은 처음에 시작하고 도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도전하고 시작할 수 있도록 부모들이 용기를 주고 잘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이들에게 주신 저마다의 고유한 능력을 잘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카운슬러로 잘 도와주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들은 바르고 매너있는 삶의 자세로 살아가는 자녀가 되도록 돕는 인생 코치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자세는 어린 시절에 배운대로 대부분 결정됩니다. 예의있고 질서있는 아이들이 되도록 가정의 부모들이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의 이유를 알게 해주고 그렇게 적용하도록 반복해서 훈련해야 합니다. 종종 공공의 장소에서 예의를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행동은 사실은 그 부모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가정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는 법, 밥을 먹는 법, 말하는 법, 대화하는 법, 함께 노는 법부터 시작하여 양보하는 법, 사과하는 법, 청소하는 법, 약자를 돕는 법들을 부모는 아이들에게 잘 코칭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마다 좋은 멘토, 좋은 카운슬러 좋은 코치의 부모로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부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로써 48주년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고 해마다 5월 셋째 주일은 창립기념주일로 지킵니다. 사람으로 치면 48세의 나이는 왕성한 중년의 나이로서 삶의 무게가 이제는 성숙하게 묻어나오는 나이입니다. 뉴욕의 많은 한인 이민 교회 가운데에 우리 교회는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입니다. 뉴욕과 뉴저지의 침례 교회 가운데에는 제일 오래된 역사의 교회입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버티면서 역사를 이어가고 교회로서 귀한 목적을 감당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무엇보다도 점점 시간이 더해질수록 여러 가지 위기를 잘 이기고 생존하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조심하면서 집중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위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공예배의 은혜가 풍성해야 합니다. 항상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공예배의 은혜는 내가 준비된 만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주일 예배뿐 아니라 주중에 드려지는 모든 공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위해서 먼저 몸을 잘 구별해야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잘 구별하여 헌신하여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형식보다도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만일 예배가 형식이 되고 그 결과 감동과 은혜가 없으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되고 맙니다. 더욱 우리 교회가 예배의 감동이 있는 교회로 세워져서 진정한 예배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주님을 닮은 제자로 세워지는 교육,양육,훈련이 살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의 경우에도 비전있는 나라가 되려면 교육이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경우에도 비전이 있고 미래가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제자로 양육되고 훈련되어야 합니다. 양육과 훈련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결단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세워져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 아래에 자기를 두는 훈련을 인격적으로 경험할 때에 변화가 가능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지정의가 새롭게 변화되어 장성한 분량이 되어지는 곳에 주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더욱 우리 교회가 양육과 훈련을 통한 제자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을 증거하는 나눔과 선교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복음과 그리고 사랑을 우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복음과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더욱 우리는 받은 사랑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공동체적으로 지역 가운데 사랑과 복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멀리 있는 민족에게도 가서 섬겨야 합니다. 더욱 선교의 지경이 더 풍성하게 확장되기를 기대하고 도전할 것입니다. 앞으로 바람은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필요로 하는 나라와 장소에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는 섬김도 생각합니다. 점점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선교 공동체로 세워져가기를 소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사명을 온전하게 잘 감당하면서 앞으로 더욱 건강하게 잘 세워져가기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유명한 시인 윌리암 워어즈 워드는 “모든 아이는 어른들의 아버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누구도 어린시절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도 어린 시절 가운데 영향력의 지배를 받곤 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시적이든 어린 시절의 영향력이 어른의 삶에 깊은 영향력을 미치곤 합니다. 유년기를 지배했던 나의 형상이 어떤 경우에는 평생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이런 영향력을 심리학자들은 “성인 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성인 아이의 삶을 사는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어른으로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성인 아이의 치유가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린 시절 좋은 영향력도 받았고 좋지 않은 영향력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영향은 괜찮지만 좋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력으로 인해서 성인이 되었어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성인 아이의 모습을 갖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 가운데에 대표적인 모습은 “마마보이” “파파보이”같은 행동입니다. 성인아이같은 어른들의 특징을 보면 어린 시절 과보호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자란 경우입니다. 그결과 주도적인 인생을 살지 못하고 항상 부모의존적인 보호의 삶의 습관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항상 의존적이고 우유부단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인 아이의 모습은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성취지향적인 어린아이” “분노하는 어린아이” “의존적인 어린아이” “ 절제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고독한 어린아이”등의 유형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미숙한 성인 아이의 삶은 결국 가정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인 아이는 내면의 분노와 원망으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상대방을 비난하고 원망합니다. 그 결과 항상 남을 탓하고 부정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성인 아이의 어른들의 가장 문제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온전하게 양육할 수 없습니다. 치유되지 못한 부모에 대한 상처에 대한 분노는 결국 자녀들에게 투사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비난하던 부모의 모습이 자기에게서 그대로 재현되어서 아이들에게 전이될 수 있습니다. 가정 가운데 부모들의 내면이 건강할 때에 아이들의 내면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처 있는 나의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내 상처가운데 부모의 영향이 분명히 있지만 부모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책임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내가 믿음으로 인정하고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록 연약한 부모로 인해서 상처받았지만 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용서와 회복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의 은혜는 우리의 과거와 화해하고 새로운 나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성인 아이의 회복의 길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성안 아이의 치유를 통해서 가정 가운데 행복이 회복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부모들의 가장 힘든 것이 아이들에게 바른 부모 노릇하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세상의 부모들과는 구별되게 성경적인 부모 노릇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부모 노릇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 부모의 경우에는 이것은 너무도 큰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도 힘든데 가정 가운데 적용을 하고 특히 아이들 교육에 그것을 적용하는 부모가 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부모는 성경적인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해 확고하고 분명한 목표를 갖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적인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목표가 반드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가장 우선 목표는 무엇일까요? 단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가장 교육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교육 목표가 세워졌다고 가정의 자녀들이 올바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반복하여 올바른 목표가 가정 가운데 자녀들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바른 성경적인 가치관들이 아이들에게 적용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확고한 부모의 목표가 있을 때에 모든 것들이 가정의 자녀들에게 바르게 적용되는 기회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적인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기술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목표가 있어도 올바른 기술이 적용되지 못하면 비효율적이 됩니다. 과거 나의 경우에도 초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미숙했던 적이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기술 중의 하나가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의 부모들의 미숙한 기술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우리는 분별하는 기술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속이는 말과 행동을 할 때에 분별하지 못하고 미련하게 대하게 될 때에 아이들의 죄의 의지를 더 발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갈등이 나타날 때에 효과적인 대화의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여서 더 문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올바른 대화와 분별의 기술은 저절로 키워 지기 보다는 부모들의 많은 교육과 더불어 기도와 묵상을 통한 하나님의 지혜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셋째, 성경적인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된 부모들에게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우선 가장 부모로서 문제가 되는 자세는 경쟁적인 부모, 일관성이 없는 부모, 주관적인 부모의 모습일 것입니다. 특히 다른 자녀들을 보면서 아이들을 비교하는 부모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일관성이 없는 부모들의 경우에는 아이들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주관적인 부모들의 경우에는 아이들의 균형적인 발달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잘 가르쳐야 함을 하나님은 강조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잘 배우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좋은 도전과 나눔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부모로서 필요한 자세는 낮아져서 기도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먼저 말씀 묵상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과 삶을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정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잘 회복하는 성경적인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날마다 세워져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3년 전에 성경 전권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 경우에 성경 전권을 한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적으로 하루 1장을 쓰는 것으로 계산해서 1189장을 마치기까지 3년을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에 결국 성경 전권을 다 필사하는 것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낙오자도 있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성경 전권 필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처음 성경 필사를 시작하던 때가 어제같은데 벌써 3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를 잘 하신 분들을 보면 그 끈기와 수고가 너무도 크다고 느꼈습니다.
이번에 성경 필사를 다하신 분들을 보면 대부분 나이가 드신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젊은 분들보다 더 시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은 시간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인생을 살고 더 믿음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성경을 가까이하고 싶은 믿음의 소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점점 더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알면 알수록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하고 싶은 매력에 끌립니다. 성경 필사를 하신 분들의 마음을 나누는 기회를 들어보면 매일 매일 성경을 쓰면서 받고 느끼고 경험한 은혜들이 너무도 크고 놀라웠습니다. 성경 쓰기를 통하여 마음 가운데 더욱 말씀의 은혜를 풍성하게 체험하게 된 기회가 되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쓰기를 통하여 매일 자기를 훈련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쓰기를 위한 시간의 우선순위를 두는 삶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정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매일 꾸준히 지켜야 하는 영적 목표가 있어서 매일 매일의 삶이 의미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매일 꾸준히 성경 전권을 마침내 다 쓰고 나서 자신의 소중한 영적 유물이 되는 경험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그 자녀들이 한자 한자 적은 성경을 보면서 가정과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소중한 영적 자산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3년 동안 힘들고 어려운 정황에서도 자기를 쳐서 복종하여 성경쓰기를 잘 감당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실 말을 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를 잘 하시는 분들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교회적으로 믿음의 좋은 본을 보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성경쓰기를 통하여 깨닫고 받은 그 은혜가 개인적으로 잘 적용되어져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을 더욱 누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앞으로 교회적으로 더욱 바라는 것은 영적인 진보와 성장을 위해서 더욱 개인적으로 잘 도전하고 적용하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세상은 메타버스의 시대입니다. 메타버스란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등 미디어에 담긴 새로운 세상 디지털화 된 지구를 메타버스라고 합니다. 메타버스는 초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와 세계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의 합성어입니다. 현실을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메타버스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페이스 북, 카카오톡, 인스타그램에 우리의 글을 올리는 것,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서 사진을 올리고 회원이 되는 것 그리고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는 것이 모두가 다 메타버스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메타버스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젠 나를 아이디로 표현하고 나를 대신하는 캐릭터의 아바타가 활동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나의 마음의 진실과 관계없이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멋있게 꾸미기도 하고 화려하고 나를 표현하면서 자유자재로 세상에서 온라인으로 개성을 표현합니다. 자신이 만든 아바타로 쇼셜미디어의 아름다운 주인공으로 자신을 만들어 선전하면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곤 합니다. 화려한 기술들을 이용하여 최대한 멋있고 능력있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상의 세계에 올리면 얼마든지 능력있는 사람으로 선전이 되곤 합니다.
메타버스를 이용하는 기독교는 일단 이 모든 것들을 좋은 선교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온라인 가운데 교회를 세상에 알리곤 합니다. 또 교회마다 카톡을 만들어서 공유하여 정보와 교제를 나누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을 통해서 예배를 공유하고 설교와 간증과 세미나를 공유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교회는 메타버스를 선교적인 도구로 잘 사용하여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메타버스의 진화와 발달을 무시하지 말고 잘 따라서 교회 가운데 선용하는 것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타버스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메타버스는 단순히 그릇과 같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하도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메타버스의 도구를 이용하여 복음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복음은 단순한 정보의 나눔이거나 지식의 나눔이 아닌 온전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할 때에 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타버스를 통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로 삼아야 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더욱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성이 되어야 합니다. 가상의 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진정한 마음과 삶을 나누는 경험을 갖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점점 메타버스에 익숙하게 될 때에 영혼 없는 아바타 같은 영성이 되어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주님을 더욱 닮아가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타버스가 점점 오고 있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더욱 마음과 몸을 다하는 체험적인 영성이 필요합니다.
올해 고난 주간은 더욱 십자가의 의미가 크게 마음에 와 닿는 시간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고난을 넘어서 지금 우크라이나의 전쟁의 고난을 지켜보면서 점점 세상의 죄악의 심각한 한계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초과학 문명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여전히 과거 이상으로 인간의 죄악의 실상은 더해진 모습입니다. 전혀 죄의식 없이 미사일 버튼을 누르고 총을 쏘면서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전쟁의 실상을 보면서 차오르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곤 해서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습니다.
과연 고난의 전쟁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이미 예수님은 고난의 시대에 오셔서 고난을 담당하시고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담당하셨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 죄를 담당하신 범위 안에는 과거 나찌에 속한 사람이나 지금 양심에 화인맞은 채로 전쟁하는 러시아 군인이나 푸틴 같은 사람에게도 적용이 될까 질문하게 됩니다. 이미 성경 속에서 역사 속에서 가장 반복되는 질문은 악인들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의 용서의 적용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적용의 대상이 원수까지도 제한없이 차별없이 적용하기를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용량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서 더 낫다 더 옳다라고 생각하는 자기의와 자기만족들이 우리에게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적용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은 죄인이요 원수같은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서 남과 나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와 자랑을 공로로 스스로를 옳다 여기며 자랑하는 나의 의는 부질없는 행위입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임으로 자기 공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전쟁을 보면서 일어나는 모든 자기 감정과 생각조차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자비와 긍휼을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화인맞은 양심으로 악을 행하는 악한 삶을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의 대속의 십자가를 담당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된 우리에게는 대속의 고난의 십자가를 담당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대속의 고난을 담당하는 것은 주님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수같은 사람들을 품고 미움을 버리고 용서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미움과 정죄의 마음을 버리고 더욱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용서하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가정에서 한 아기가 태어나 성인이 되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생의 주기입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가정의 부모와 같은 어른의 최선의 도움이 요구됩니다. 먹는 것, 옷을 입는 것, 걷는 것, 말하는 것 등의 생활에서부터 모든 교육에 이르기까지 한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어른들의 엄청난 인내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어린시절 어른과 가정의 도움을 잘 받은 아이는 결국 잘 자라서 성인이 되면 가정과 이웃을 위하여 섬기는 귀한 일꾼이 됩니다. 가정의 한 어린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인으로 잘 자라는 것이 결국 가정을 세우고 세상 나라를 세우는 힘이 됩니다.
우리 신앙도 어린아이의 신앙의 단계를 지나서 반드시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하지 않고 어린아이의 신앙의 상태로 정체되는 경우에 심각한 관계의 문제를 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신앙을 갖은 사람은 육신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세울 수 없습니다. 성경의 고린도교회는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교회 공동체가 심각한 문제를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따라 분쟁하는 문제, 교회 질서가 깨지는 문제, 음행과 같은 윤리적인 문제, 우상숭배같은 믿음의 문제등 다양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을 갖은 사람은 분별력이 없고, 절제가 없고, 덕이 없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은 어른의 신앙으로 변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어른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이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젖을 끓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젖만 먹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각을 사용하여 굳고 딱딱한 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에 어른의 신앙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어른의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과 생각이 자라야 가능합니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안에 마음과 생각이 먼저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물론 장성한 분량의 마음과 생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자기를 쳐서 말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어른의 신앙으로 세워진 사람의 가장 외적인 행위는 철저히 자기 중심보다는 공동체를 세우는 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어른 신앙을 갖은 사람은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나보다 남과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덕이 있습니다. 어른의 신앙을 갖은 사람은 자기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낮은 곳으로 더 고난을 받으면서 자기를 쳐서 복종하면서 성령님을 따라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그 결과 어른의 신앙의 사람이 있는 곳에는 성령님의 인격적인 열매를 통한 아름다운 향기가 나타나고 연약한 사람들이 세워지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먼저 각 사람이 주님의 장성한 어른의 신앙으로 세워지는 일들이 더해짐으로 결국은 교회공동체도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