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계절을 통하여 다양하게 우리에게 만나주십니다. 계절마다 다양하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봄의 나무 그리고 꽃을 통해서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더 푸르른 하늘을 통해서 더 넉넉한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봄 계절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봄에 만나는 하나님은 생명의 신비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봄을 통해서 생명의 신비를 하늘에도 보게 하고 땅에서도 느끼게 하고 모든 공간 중에서도 알게 하십니다. 봄이 되면 죽었던 것같은 모든 곳에서 봄과 함께 놀라운 생명의 역사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모든 곳에 봄이 오면 어김없이 놀라운 생명의 역사들을 통해서 만물을 통해서 꿈을 갖게 되고 기쁨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자연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 가운데 봄이 오게 하십니다. 인생의 봄은 인간의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찾아오셔서 생명으로 일하시는 사람은 새로운 인생의 꿈을 갖는 봄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봄에 만나는 하나님은 때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봄에 피는 모든 꽃들은 지극히 제한적인 시간을 머무르다 갑니다. 그 화려한 벚꽃의 시간들은 보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끝이 납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의 제한된 시간들은 하나님이 허락한 시간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봄꽃들의 시간을 너무도 짧은 시간으로 제한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시간들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하시되 우리에게는 꽃같은 인생을 통해서 제한되니 인생의 시간들을 돌아볼 것을 권고하십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꽃과 같은 인생임을 바라보시면서 잠깐의 유한한 인생 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기대하십니다.
봄에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만물을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연히 피고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백합화를 창조하고 들에서 피도록 섭리하기 때문입니다. 백합화는 우연히 들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하심으로 들에서 피고 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놀라운 섭리를 갖고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너무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들에 피는 백합화를 주관하시듯이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새벽마다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함께 갖았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새벽마다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체험하는 은혜를 갖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몸으로 직접 고난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체험을 통해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더욱 아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몸을 깨워 기도하면서 고난의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깨우며 주님을 주님으로 회복하는 기회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의 시간들은 반드시 삶으로 인격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체험들은 삶과 인격으로 연결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과의 체험이 바른 체험이라면 바른 인격과 바른 삶의 체험으로 반드시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바른 신앙 체험은 자기를 내려놓는 체험입니다. 성경의 사도바울은 날마다 자기 몸을 쳐서 주님의 주인되심의 체험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죽고 주님으로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이요 바른 신앙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주인되는 삶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인이 되기 위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고 주님에게 복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나의 헛된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나의 육신의 엣습관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복종이 필요합니다. 나의 복종없이는 주님의 주인되심도 없습니다. 나를 쳐서 복종하여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인격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더욱 주님 중심의 삶의 체험으로 승리합니다.
바른 신앙 체험은 주님이 주인되는 체험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교회에서 주인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공 예배를 드릴 때에 먼저 주님이 주인되시는 바른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주님이 주인되기 위해서는 그 외의 것들은 좀 내려놓음이 필요합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결국 주님에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 중심으로 교회 생활을 할 때에 사람들의 거슬리는 부분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혹시 예배 속에서 교제 속에서 주님이 주인되는 교회 생활은 사람을 넘어서 결국 주님 중심의 바른 공동체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사람 중심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 체험을 하면 할수록 상처의 연속일 될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 가운데 운행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체험하시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더욱 온전한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바른 신앙 체험은 삶의 우선순위가 주님되는 체험입니다. 매일 주님과의 만남을 우선순위로 여기는 바른 만남의 사람이 결국 삶 가운데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승리합니다. 구체적으로 날마다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반복하여 주님과 대화하고 깊은 묵상의 나눔과 만나는 사람은 일상에서 바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일이 우선순위가 되는 사람은 일의 승리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주님의 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심으로 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일과 생활은 결국 의미없는 일상이 될 뿐입니다. 얼마든지 세상 사람들도 이런 삶은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일 모든 삶 가운데서 바른 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주인되는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선 순위 가운데 주님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믿음이 기초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가장 큰 수치요 고난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의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사람을 매어달고 서서히 힘든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극한 고통을 최대한 온 몸으로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서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극한 고난을 겪으시고 결국 운명하셨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사형수의 죽음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눅22:43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시면서 순종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기 위하여 온 무리를 향하여 베드로가 검으로 대적하였을 때에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 하시고 순순히 순종의 몸이 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그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친히 못 박히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난의 시간을 체험하시고 마침내 고난 가운데 죽음의 순종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죽음은 자기 백성들의 대속을 위한 순종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자기 백성들을 되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구원을 위한 목적을 완성하시고 마침내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반드시 치루어야 할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구원을 위한 고난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를 약속하셨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세상적으로 보면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마침내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가장 묵상해야 할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 앞에서 순종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선물은 오직 십자가의 고난의 댓가입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받은 구원의 은혜를 더욱 묵상하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소원합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운동과 신앙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운동을 구경하는 사람과 직접 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은 너무도 다릅니다. 이론적으로 축구에 관하여서 기가 막히게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몸으로 축구를 해보면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내가 안다도 생각하고 말을 하지만 직접 몸으로 해보면 잘 되지 않습니다. 실력있는 선수는 내가 아는 대로 그대로 몸으로 적용이 되는 선수입니다. 운동선수가 내가 아는 대로 몸으로 그대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반복하여 연습할 때에 가능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고수는 결국 아는 대로 적용하는 삶이 있는 사람입니다.
적용의 은혜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기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은 오직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내가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적용이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말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삶 가운데 부족한 삶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적용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자기 부족함을 알고 돌아보는 사람들입니다. 적용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보면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항상 조용하고 꾸준하게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면서 일상의 삶을 승리합니다.
적용의 은혜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복을 경험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이땅에 임하여서 다양한 은혜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은 대부분 눈에 보이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고 체험할 수 있는 누림의 복들이 많습니다. 특히 마음 가운데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은 놀랍고 기이합니다. 또한 일상 가운데 하나님이 베푸시는 인도의 은혜는 기이합니다. 많은 경우에 적용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경험하도록 인도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적용의 은혜의 결과로 누리는 핵심적인 복은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여 주님을 닮은 제자로서 우리가 새롭게 변화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사실 성경가운데 일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적용하면서 살았던 하나님의 위대한 증인들처럼 하나님 앞에 쓰임받습니다. 적용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변화로 인해서 주변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용이 있는 구체적인 믿음의 능력있는 삶입니다. 내가 믿은 대로 내가 바르게 적용하면서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신앙의 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서를 적용해야 합니다. 용서 없는 신앙은 주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용서 없는 삶은 주님의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은 용서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용서를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용서를 적용하기는 힘들어도 그 적용의 결과는 형용할 수 없는 풍성함을 얻습니다. 분명한 것은 용서의 십자가가 그 마음에 있는 사람은 용서를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마지막에 보여주신 것은 용서였습니다.
용서의 적용을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받은 그 크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나를 무조건적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나는 20대 때에 불의하고 부정한 사회를 보면서 많은 분노와 원망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20대 때에 내가 본 교회 어른들의 부정과 잘못됨을 보면서 상처가 컸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보는 이웃들의 죄보다 더 크고 무서운 죄를 내 안에 갖고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를 모든 죄를 정죄하지 않고 내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였을 때에 용서의 자유함을 주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고 용서받은 것을 알게 되면서 상처의 이웃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의 적용을 위해서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정말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용서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용서할 수 있도록 마음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용서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성령님이 계시고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용서의 적용은 필연적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소멸하고 내 감정과 내 생각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성령님의 인도를 소멸하고 용서의 적용을 거부한다면 가장 손해는 우리 자신일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 없는 우리 마음은 지옥같이 갑갑하고 답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가운데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용서의 마음을 소멸하지 말고 용서를 적용해야 합니다.
용서의 적용을 위해서 내가 먼저 적용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왜 내가 먼저 적용해야 합니까? 결국 용서하지 않을 때에 가장 피해자는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서하기를 주님은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적용할 때에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지금 당장 적용해야 할 긴급한 주제입니다. 만일 지금 적용하지 않을 때에 사탄 마귀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노리고 공격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가운데 미움과 원망과 비판과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납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결국 마귀의 도구가 되어 모든 관계를 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를 시작할 때에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봄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도 용서와 더불어 따뜻한 새봄을 맞이하는 회복과 소생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즘 한국 TV에서 사이비교주 JMS를 다룬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가 한국의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 정명석은 자신을 메시야로 자처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문제는 다수의 20-30대 위주의 지성인들 사회의 소위 엘리트층 사람들이 여기에 속았습니다. 사이비 이단에 속은 많은 사람들 중에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갖고 삶을 삽니다.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는 실제의 피해자들 다수인 여자들은 JMS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심하게 당한 것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이비 이단에 속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에 힘든 휴유증을 겪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사이비 이단과 같은 가짜 종교에 속게 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의 공허함을 느낄 때에 자신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더 자극적이고 강한 종교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많은 기독교 사이비 이단들은 교묘하게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그 결과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앞세우고 눈에 보이는 신비한 능력을 강조하고 눈에 보이는 친절한 접근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붙잡습니다. 대부분 무지한 사람들은 선동성의 사이비 이단들의 유혹하는 말과 작전에 결국은 포로가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이단에 빠지는 많은 다수의 사람들의 이미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출석하지만 성경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이단 사이비들에게 속아서 넘어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사이비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 미혹할 때에 기존 교회에서 받아보지 못했던 극진한 관심과 사랑으로 마음을 훔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성경과 기도를 강조하면서 기존교회와는 다르게 더 깊고 영적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결국 영적으로 무지하여 분별력이 없음으로 인해서 사이비이단에 속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갖고 바른 이야기를 해주어도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이단 사이비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깨어서 분별력있는 영혼과 믿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이단 사이비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공격하는 사탄과 귀신들의 유혹과 공격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 생활은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더 철저하게 깨어서 영적으로 공격하는 모든 유혹과 도전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영적으로 분별력을 갖고 미혹의 시대를 잘 이겨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요즘 교회들마다 화두는 어떻게 교회로 다시 모일까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이후에 교회들마다 교회공동체에서 멀어진 성도들을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할까 고민입니다. 특히 코로나 시대에 온라인의 자유로운 예배에 익숙한 성도들의 경우에는 대면으로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집에서 자유롭게 온라인으로 예배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과 인도에 대해서도 자신의 신앙을 제한하고 구속한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교회로 모여 교회공동체와 함께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여서 함께 예배해야 합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함께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구약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로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하였습니다. 신약에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교회를 통하여 예배하였습니다. 교회는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마치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교회는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모든 습관을 버리고 더욱 함께 예배하기 위해 다시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여서 함께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지만 서로 교제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서로 얼굴을 보고 마음을 열고 나누면서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교회 교제는 세상적인 사람들의 교제와 구별됩니다. 세상은 돈과 지식과 권력을 따라 차별이 있는 만남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서로 차별없이 평등하게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제하는 가운데 약자를 배려하고 잘 환영하여야 합니다. 함께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교제를 위해 우리는 다시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여서 함께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할 때에 더욱 주님의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여서 서도의 삶을 나누면서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예수님 안에서 받은 성도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이웃에 대한 공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삶 가운데 나를 기억하고 기도하는 교회가 있음은 인생의 큰 힘과 소망이 되는 기회입니다.
지난 주간에 장례식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은 교회의 중요성입니다. 죽음의 마지막 시간에 교회와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고 기도하면서 장례식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교회로 모이는 우리의 믿음과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에 목회자 독서 모임에서 나눈 책이 “죽은 교회를 부검하다”였습니다. 저자는 미국의 톰 레이너 목사인데 목회 컨설턴팅의 전문가입니다. 저자는 죽은 교회의 특징을 소개하면서 미국만 해도 해마다 10만개 정도의 교회가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14개의 교회를 자세히 조사하고 분석하여 나타나는 죽은 교회의 10가지 문제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교회가 죽은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끓임없이 변화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죽은 교회인가? 살아있는 교회인가? 이 책의 저자의 주장대로 우리 교회를 부검해보면 죽은 교회는 아니라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교회도 언제든지 죽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끓임없이 변화에 대한 도전이 없으면 결국 죽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실에 안주하여 만족하고 새롭게 하지 않으면 이내 죽은 교회가 될수 있습니다. 특히 이민교회의 특성은 세우기는 힘이 들어도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잠깐인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공동체가 더욱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는 변화를 위해서 먼저 한사람 한사람 변화를 위하여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변화의 영적 도전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를 보면서 감사한 것은 새롭게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들이 함께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려고 하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살아있는 교회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몇가지 과제가 필요합니다.
첫째,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 변화의 도전이 필요합니다. 공동체 교회를 세우는 신앙은 우선 함께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공동체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나누는 교제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일 뿐 아니라 주중에 함께 공예배를 참석하는 신앙, 함께 합심기도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중에 함께 공동체와 일정하게 시간과 모임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결국 공동체 교회를 세워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여 교회를 섬기는 도전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그래도 많은 평신도들이 자신의 은사를 중심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섬김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썩이지 말고 잘 사용하여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신앙의 도전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비록 죽은 교회는 아니지만 실상을 부검하여 보면 아직도 부족함이 많고 고쳐가야 할 연약함이 많은 교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 한사람부터 과거에 빠져 있거나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변화를 위한 결단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죽은 교회가 아닌 살아있는 교회로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교회적으로 제자훈련을 3월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지상 교회의 우선 목적은 제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양육과 훈련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시간과 마음과 몸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반드시 고난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쁜 삶과 역할들 때문에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면서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는 삶을 살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선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시간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로서 세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귀중한 시간을 온전히 주님을 위하여 내어드리는 댓가가 필요합니다. 물론 주중에 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훈련하면서 드려야 할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최소한 일주일에 3시간 정도의 훈련시간의 댓가를 요구하면서 이 시간을 통해서 매주 나의 삶을 점검하고 또한 나의 앞으로 삶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준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제자로 훈련받기 위한 시간을 미리 우선순위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다음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몸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을 좇는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받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주와 함께 고난받고 주님의 제자로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훈련받으면서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삶을 훈련받지 못하면 결코 좁은 문 좁은 길의 주님의 제자로서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자리로 나의 몸을 내어드리는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면서 제자훈련에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순종하는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믿음은 이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론적인 믿음은 삶의 적용을 통해서 능력있는 믿음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머리의 믿음은 가슴의 믿음 손발의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순종의 적용을 통해서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말로 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 삶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순종하는 훈련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복하는 순종을 통해서 훈련되어질 때에 주님의 제자로서 아름답게 쓰임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댓가를 지불하면서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게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은 일하십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 댓가를 지불하면서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는 교회에서 목장 컨퍼런스를 함께 갖았습니다. 2분의 목자 간증을 통해서 교회 안의 목장 모임의 중요성을 함께 공유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목장 세미나를 통하여 목장 모임의 목적과 사명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목장 설문지를 함께 나누면서 목장에 대한 개인들의 마음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목장 설문지를 통해서 다양한 분들의 각각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 모임의 방향을 조율하는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목장 설문지를 통해서 가정에서 목장 모임을 갖는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로는 가정에서 모임을 하면서 조금 더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분위기와 형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모임으로 인해서 더 개인적인 삶을 더 나누고 알 수 있고 마음을 더 나누면서 교제에 더 집중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바램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진정한 교제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마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진정한 교제에 목말라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장 설문지를 통해서 모임을 갖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인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임을 갖을 때에 자신의 집을 오픈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특히 비좁은 공간의 문제, 청소를 해야 하는 문제,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점, 너무 자신의 삶이 노출되는 점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들이었습니다. 교제가 필요하고 분명히 좋지만 또한 교제에 따른 여러 가지 불편한 것들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여러 가지 가정에서 교제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함께 그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서로 조심하면서 만남을 갖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목장을 함께 하면서 갖는 기대감들은 목장 가족공동체로서 서로 교제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더욱 친밀하게 하나되는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특히 서로 관계하면서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는 목장 모임이 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관계는 서로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 함께 노력하면서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목장이 서로 좋은 관계를 갖는 교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잘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비록 개인적인 스케쥴이 있어도 조정하여 함께 참여하면서 만날 때에 우리는 서로 관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시대를 겪으면서 교회가 가장 회복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가 교제입니다. 목장 모임은 가정에서 서로 함께 교제함으로써 멀어졌던 우리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교제의 대안입니다. 2023년 우리 교회의 목장 모임이 마음을 열고 서로 아름답게 교제하는 모임으로 잘 세워져가기를 기도하면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