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서로 본받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누구를 본받는가에 따라서 신앙의 질과 방향이 결정됩니다.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누구도 인도자 없이 걸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성경의 바울도 바나바와 같은 본받을 수 있는 좋은 멘토의 도움이 있었고 디모데와 같은 어린지도자는 바울과 같은 본받을 수 있는 좋은 멘토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과거뿐 아니라 지금 이시대에도 신앙의 길을 온전히 가기 위해서는 영적 멘토링이 필요합니다.
멘토라는 단어는 그리스 신화에서 온 것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아들을 멘토에게 맡기게 됩니다. 오디세우는 전쟁에 나가면서 아들을 멘토에게 맡기면서 “책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얻게 하는 데도” 책임을 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멘토는 지성과 영혼의 교육과 지혜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멘토의 본은 예수님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멘토가 되실 때에 철저하게 관계를 중심으로 삶의 본과 가르침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상황 속에서 주님의 멘토링은 무엇보다도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서 보고 듣고 알 수 있도록 멘토링을 해주신 것입니다.
멘토링 사역은 목회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평신도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과연 멘토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보통 우리는 최고의 멘토를 공식적인 직분을 갖고 있거나 눈에 띄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멘토는 외적으로 눈에 보이는 위치로 결정되지 않고 삶의 방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삶을 사는 사는 방식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멘토의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완전에 못 미치는 우리의 삶도 다른 사람들의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멘토의 관계와 사역은 먼저 상처받을 각오를 하는 용기를 갖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시고 이땅에 오셔서 섬김으로 위대한 멘토가 되신 것처럼 멘토의 시작은 자기 비움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웨은 ‘상처입은 치유자’ 책에서 결국 위대한 치유자는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자라야 가능합니다. 상처받는 가운데 멘토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고 채워진 사람입니다. 결코 멘토는 해결사가 아니지만 해결의 능력이 되신 하나님으로 무장되어 도움을 받는 자들에게 길을 안내할 수 있는 멘토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멘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듣기와 더불어 홀로 있는 침묵의 시간을 많이 갖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체험의 영성이 있는 깊은 은혜가 있을 때에 우리는 남을 도울 수 있는 민감한 영적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평범한 일상을 자연스럽게 반복하는 상황의 경험이야말로 제일 좋은 멘토의 자기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은 교회 가운데 좋은 평신도 멘토들이 많이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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