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을 기준으로 한해 교회의 재정을 결산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올해 교회 재정 결산은 목표한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심으로 결산했습니다. 이렇게 결산이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인도하심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헌신을 기꺼이 감당하신 집사님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헌금의 우선 요소는 십일조입니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 무용론을 주장합니다.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은 법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전부가 아버지의 것임을 인정하기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전의 성경의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했습니다(창14:20). 야곱은 벧엘에서 십일조를 맹세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시대에 십일조의 율법을 제정하셨을까요?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십일조를 행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형식보다는 바른 정신으로 십일조를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면서 날을 지키는 주일의 문제, 헌금을 드리는 문제와 같은 것들을 극단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소위 보수를 주장하는 교회에서는 너무 엄격하게 법적인 차원으로 강조하려고 하고 자유주의 계통에서는 너무 자유스럽게 몰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차원, 자유스러운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 ‘관계’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행위요 반응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가는 것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몸도, 시간도, 물질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권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법과 나의 자유를 넘어서서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를 담은 관계의 고백인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풍성하게 하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헌금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합니다. 고후8: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결국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균증하게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있는 자들의 있는 것들로 인해서 없는 자들이 있는 자들의 드리는 것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수단이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기심이 앞서거나 다른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서 인색함이 우선 되어지는 경우에는 결코 헌금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말로는 인정해도 믿음으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헌금은 바로 그 믿음의 고백이요 헌신인 것입니다. 그 헌금 가운데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정성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 1년동안 헌금의 고백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받고 살아온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그 풍성한 헌금의 양만큼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믿음, 풍성한 관계가 우리 속에 모두 경험되었던 한해였으면 좋겠습니다. 결산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 풍성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일하심을 찬양하며 송축합니다.

Category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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